채견(蔡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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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중국 남부 해안에서 발흥한 해적 집단의 우두머리.

개설

채견(蔡牽)은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 동안(同安) 출신으로, 채건(蔡騫)이라고도 부른다. 청대 건륭제 시기에 궁핍한 어민과 서원들을 이끌고 광동성 연해나 복건성의 장주(漳州)·천주(泉州) 인근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남부 해안의 해적 집단을 지휘하며 대만(臺灣)과 월남(越南) 지역의 해적 세력까지 규합하여 청군의 포대를 습격하고 상인을 약탈하여 동남해상의 무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활동 사항

채견은 어릴 적에 부모가 죽어 직물을 짜고 그물을 수리하는 등의 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1794년 죄를 짓고 바다로 도망가 해적이 되었다. 복건성 해역의 봉미방(鳳尾幇), 수오방(水澳幇) 및 광동성(廣東省), 안남(安南) 해역의 정비방(艇匪幇) 세력 등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1797년 100여 척의 선박과 20,000여 명을 통솔하며 남부 해안의 패권을 장악하여, 지역인들에게 대출해(大出海)라는 존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채견은 당시 복건·대만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많은 호족 세력들이 안전을 위하여 그와 밀약을 맺었다. 그는 자신의 허가를 받은 배에 노란색의 ‘면겁(免劫)’이 쓰인 깃발을 발급하였다. 1799년 그는 영어를 구사하였던 무기전문가 임옥요(林玉腰)와 혼인하였다. 그녀의 능력은 채견 집단의 재부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1802년 복건성 하문(廈門) 해안의 포대를 습격하고, 1804년에는 대만의 녹이문(鹿耳門: 현 대만 타이난 지역 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절강제독(浙江提督)이장경(李長庚)의 공격으로 후퇴하였다. 1805년 세력을 키워 대만 호미(滬尾: 현 타이베이시 북부 단수이구) 지역을 근거로 반청정권을 건립하였다. 광명(光明)을 연호로 사용하고, 자신을 진해위무왕(鎭海威武王)이라 칭하고, 광명정대(光明正大)를 새긴 옥새(玉璽)를 만들었다. 1807년 이장경과 복건제독(福建提督)장견승(張見陞)의 협공으로 광동성 해역(현 홍콩 주변)에서 패배하였다. 1809년 절강제독이던 왕득록(王得祿)이 절강성의 온주 해안에서 채견의 함대를 둘러싸고 공격하였고, 결국 자살하였다.

당시 채견 등 해적 집단의 발흥은 백련교(白蓮敎)의 난과 함께 청말의 사회적 혼란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조선에서도 청에 다녀오는 사신을 통하여 이들 집단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순조실록』 9년 3월 13일) (『순조실록』 9년 12월 15일).

참고문헌

  • 『청실록(淸實錄)』
  • 『대만통사(臺灣通史)』
  • 다이앤 머레이 지음, 이영옥 옮김, 『그들의 바다: 남부 중국의 해적, 1790-1810』, 심산, 2003.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 중국사 5: 중화제국의 동요』, 지식산업사, 1989.
  •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