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彰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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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성곽의 서북쪽에 설치한 소문.

개설

조선초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최초로 성곽을 조성할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사대문으로는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설치했다. 사소문으로는 동북에 홍화문(弘化門: 후에 혜화문), 동남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에 소덕문(昭德門: 후에 소의문), 서북에 창의문(彰義門)을 두었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내용

조선초에 건국과 더불어 한양 성곽의 서북쪽 소문을 창의문이라고 했지만 조선초 『조선왕조실록』에서 창의문이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적다. 창의문 대신에 장의문(莊義門)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등장한다.

조선초에 창의문과 관련된 사료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풍수에 관한 것들이다. 1446년(세종 28)에는 “장의문은 경복궁을 누르고 있어 해가 되니 사람을 통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술사의 말을 따라 길을 막고 이곳에 소나무를 심어 공식적인 업무 외에는 사람의 통행을 금지했다(『세종실록』 28년 4월 15일). 1452년(문종 2)에도 유사한 의견이 제시됐다. 풍수학 문맹검(文孟儉)이 여러 왕릉과 도성의 풍수에 대해서 비보해야 할 사항들을 언급했다. 문맹검은 앞서 세종 때에도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장의문은 천주(天柱)의 자리인데,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것이 미편하니 항상 닫고 열지 말아 천주의 자리를 보전하게 하소서.” 하며 장의문 출입을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문종실록』 2년 3월 3일). 1469년(예종 1)에는 왕이 병조(兵曹)에게 “앞으로 장의문을 열지 말라.”고 지시했다(『예종실록』 1년 3월 9일). 어떤 까닭에 장의문을 폐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역시 풍수적인 이유일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3가지 사례는 모두 장의문과 관련한 것인데 내용에 등장하는 한자는 ‘장의문(莊義門)’, ‘장의문(藏義門)’, ‘장의문(壯義門)’으로 모두 다른 글자를 사용했다. 당시 창의문에 문루를 만들고 현판을 내걸었다면 이렇게까지 다양한 표기로 나타나기 어려울 정도이다. 글자의 뜻으로만 보면 한양의 성문으로서 ‘창의문(彰義門)’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만 창의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창의문 밖에는 오랜 역사를 갖는 ‘장의사(藏義寺)’라는 사찰이 위치하였다. 이 사찰의 당간지주는 오늘날 보물 235호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세검정(洗劍亭) 주변에서 장의사의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까닭인지 주변 마을의 이름 역시 장의동이라고 했다. ‘창의’와 ‘장의’의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창의문이 아닌 장의문으로 불렀다고 할 수 있지만 납득하기 어렵다. 혹시 풍수적인 금기 때문에 명칭을 바꾼 것이 아닐까도 상상해 보지만 이 역시 참고할 만한 자료는 없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연산군일기』는 창의문과 장의문을 혼용하였으며, 『중종실록』부터는 장의문은 사라지고 모두 창의문으로 기록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양 성곽에 창의문이 계속 존치되었다. 하지만 조선초와 같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617년(광해군 9)에는 인경궁(仁慶宮)을 영건하기 시작했다. 이 궁궐에 사용할 석재는 창의문 밖에서 떠다가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창의문을 밤낮으로 열어서 석재 운반로로 이용하도록 했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인조 15)에는 사은표(謝恩表)를 제작할 종이를 급히 만들기 위해서 창의문을 밤낮으로 열어 두기도 했다.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가 창의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장인들 및 조력꾼들의 출입을 위해서였다. 이후에도 창의문 주변 성곽이 무너져 보수하는 공사를 진행하는 등 계속적으로 창의문이 유지되었다.

1740년에도 창의문 보수공사를 실시했다. 『승정원일기』 1740년(영조 16) 6월 9일자에는 “창의문의 홍예석이 부서졌고 문짝이 썩어 보수공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문짝은 급히 하루 이틀 안에 고치기를 마쳐 다시 걸도록 하겠으며, 홍예석은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홍예석 보수공사는 다음 해 봄에 시작하기로 했다. 1740년(영조 16)에는 훈련대장(訓鍊大將)구성임(具聖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의군이 들어온 곳이기 때문에 마땅히 개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영조실록』 16년 8월 1일). 그런데 보수공사를 실시하기 전인 1741년(영조 17) 1월 23일에 창의문에 문루를 만들자는 논의가 진행됐다(『영조실록』 17년 1월 22일). 문루의 규모, 단청, 부연 설치 등에 대한 것을 논의했는데, 영조가 “지세가 험준하기 때문에 크게 지을 수 없으니 규모를 중성문(中城門)과 같게 하면 된다. 단청 등은 중성문보다 약간 급을 높여서 실시하지만 돈의문(敦義門)보다는 낮게 하라.”고 지시했다. 홍예에 대한 보수는 5월 18일에 마쳤고, 6월 16일에 새로운 문짝을 만들어 걸었다.

1956년에 창의문을 수리하면서 발견한 상량문에 따르면, 1741년(영조 17) 6월 16일에 상량식을 실시했다. 8월 11일에 시상을 위해 공사에 참여한 인원들의 별단을 들이라는 지시가 있어 창의문 문루는 8월쯤에 이미 완료된 듯하다. 창의문의 현판은 조명교(曺命敎)의 필체이다. 1743년에는 영조가 직접 창의문 문루에 행차해 이곳에서 시를 짓고 인조반정 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명단을 판에 새겨 걸어 놓도록 했다(『영조실록』 19년 5월 7일).

오늘날 한양의 사소문 가운데 조선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것은 창의문이 유일하다. 서소문(西小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광희문과 혜화문은 위치를 옮겨 복원했다. 따라서 창의문은 조선시대 한양 성곽의 사소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서울특별시,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1999.
      1. 그림1_00017943_창의문 1, 『조선고적도보』 10권.
      2. 그림2_00017943_창의문 2, 『조선고적도보』 10권.
      3. 그림3_00017943_창의문 3, 『조선고적도보』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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