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부(昌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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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창원부(昌原府)는 신라의 굴자군(屈自郡)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양주(良州) 관할하의 의안군(義安郡)이 되어 영현(領縣) 세 곳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의안이라 불렀지만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하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김주(金州: 현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의 속군현(屬郡縣)이 되었다. 12세기경부터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1282년(고려 충렬왕 8)에는 의창현(義昌縣)으로 개명되고 현령관(縣令官)이 임명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인 1408년(태종 8)에 의창현과 회원현(會原縣: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마산합포구 일대)이 통합되어 새로이 창원부가 출범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가 되었다.

조선초기 이래 창원부에는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이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선조 34)에 창원도호부는 창원대도호부로 승격하였으나, 경상우병영은 1603년(선조 36)에 진주(晉州)로 이전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창원부는 창원군이 되어 23부의 하나인 진주부(晉州府)의 관할하에 편성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창원군은 경상남도의 3등군이 되었으며, 1899년(고종 36)에는 마산포(馬山浦)가 개항하였다. 1908년(순종 1)에 진해군과 웅천군을 병합하였고, 1910년(순종 3)에는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에는 마산부와 창원군으로 분할되었다. 조선시대에 창원부의 읍치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창원부는 신라의 굴자군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의안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에 들어와 의안군으로 다시 명칭을 고쳤으며, 1018년에 김주에 소속되었다. 이후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읍격도 현으로 변경되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의 근거지가 되었던 까닭에 1282년에는 의창감무가 의창현령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인 1408년에 의창현과 회원현을 통합하여 창원부를 새로이 출범시켰으며(『태종실록』 8년 7월 13일), 읍치는 옛 의창현의 자리에 두었다. 1415년에 창원도호부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창원부는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양주 관할하의 의안군이 되었으며, 의안군은 칠제현(漆隄縣: 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일대), 합포현(合浦縣: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마산합포구 일대), 웅신현(熊神縣: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대) 세 곳의 영현을 거느렸다. 당시 의안군에는 군태수(郡太守)가 임명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의안은 김주에 소속되었다가 12세기경부터 감무가 파견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후기에 의안은 의창으로 개명되고 감무 대신 현령이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의창과 회원이 통합하여 새롭게 창원부 즉 창원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의안이 김주의 속군현이었을 때는 물론이고 외관청(外官廳)에 근무하던 감무나 현령이 파견되었을 때에도 별도의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창원부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조선시대에 창원부의 읍치는 옛 의창의 읍치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창원부의 영역은 기존 의창과 회원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종3품의 부사와 종6품의 교수(敎授)가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정3품의 무관(武官)이 부사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90명, 인리(人吏) 49명, 지인(知印) 17명, 사령(使令) 22명, 군뢰(軍牢) 14명, 관노(官奴) 37명, 관비(官婢) 16명이 편성되었다. 창원도호부는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하였으므로 이때의 부사는 대도호부사이며, 조선전기에 파견되던 교수는 이때에 이미 폐지되었다. 19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정3품의 대도호부사가 임명되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판관과 교수는 폐지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대도호부사는 안동과 창원 2개 고을에만 임명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창원의 호수가 1,094호, 인구는 4,955명으로 나와 있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에 창원부의 호수가 7,344호, 인구는 28,309명으로, 그중 남자가 11,718명이고, 여자가 16,591명이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창원부의 호수는 7,264호, 인구는 29,452명으로, 남자는 12,216명, 여자는 17,236명이었다. 1910년(순종 3)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창원의 호수는 22,439호이고, 인구는 107,817명으로 급증하였다. 그중 남자가 56,161명, 여자가 51,656명이라 기록되었다.

『호구총수』에 의하면 창원에 5개의 면과 106개의 리가 기재되었다. 5개의 면은 부내면(府內面)과 동면(東面), 서면(西面), 남면(南面), 북면(北面) 4개의 방위면으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여지도서』에는 5개의 방위면 예하에 16개의 운(運)이 편성되었는데, 운은 방(坊)을 의미한다. 『여지도서』의 16개 운은 동면 예하의 일운(一運)·이운(二運)·삼운(三運), 서면 예하의 일운·이운·삼운, 남면 예하의 일운·이운·삼운과 도하일운(道下一運)·도하이운(道下二運), 북면 예하의 일운·이운·삼운, 부내면 예하의 일운·이운 등이다. 그런데 『민적통계표』에는 창원에 18개의 면이 편제되었다. 이 18개 면에는 새로이 창원에 편입된 옛 진해(鎭海: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북면·진전면 일대)와 웅천(熊川: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대)의 영역이 포함되었다. 『민적통계표』에 실린 18개의 면은 외서면(外西面), 구산면(龜山面), 내서면(內西面), 부내면(府內面), 상남면(上南面), 하남면(下南面), 북면(北面), 동면(東面), 대산면(大山面), 웅중면(熊中面), 웅서면(熊西面), 웅읍면(熊邑面), 웅동면(熊東面), 천가면(天加面), 진동면(鎭東面), 진서면(鎭西面), 진북면(鎭北面), 양전면(良田面)이다. 조선시대에 창원부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조선초기 이래 창원부의 옛 합포 지역에 경상우병영이 설치되어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가 주둔하였다. 하지만 창원에 있던 경상우병영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1603년에 진주로 이전되었다(『선조실록』 36년 5월 2일). 다만 임진왜란 때 창원부가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았던 까닭에 1601년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61년(현종 2)에 고을에 보관하던 전패(殿牌)를 분실하였기에 창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70년(현종 11)에 다시 창원대도호부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창원대도호부는 창원군이 되어 진주부의 관할 영역에 포함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창원군은 경상남도 관할하의 3등군으로 편제되었다. 1899년에 마산포의 개항으로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가 개설되었으며, 창원군은 창원부로 개칭되었다. 1903년(고종 40)에 창원부는 다시 창원군으로 환원되었다가, 1906년(고종 43)에 다시 창원부가 되었다. 1908년에 창원부는 인접한 진해군과 웅천군을 합병하였다. 1910년에는 일제에 의해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에는 마산포 지역을 중심으로 마산부가 별도로 분리되고 나머지 지역이 창원군으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