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진(昌城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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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창성군에 설치한 육군진.

개설

평안도 서북면(西北面) 최북단에 위치한 육군진관으로 북방 방어의 최대 요충지였다. 조선초기에 설치되어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인해 한반도 서북면이 고려의 영토로 다시 편입되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북방 정세가 안정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평안도 지역의 행정조직과 방어체제 정비 문제가 부각되었다. 태종은 기존 양계(兩界)로 호칭되던 이 지역에 도제(道制)를 적용하는 한편, 행정체제와 군사제도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1402년(태종 2) 창주이언과 니성이언을 합쳐서 창성군(昌城郡)이 설치되었다. 행정체계와 군사체제가 중첩되어 있는 조선시대에는 행정체제의 정비는 곧 군사체계의 정비를 수반하게 되었다. 이 시기 서부 지역의 군사조직은 주로 고려의 익군(翼軍)을 계승한 군익도(軍翼道)체제로 정비되었다. 이로 인해 1423년(세종 6) 평안도에는 평양도(平壤道), 안주도(安州道), 의주도(義州道), 삭주도(朔州道), 강계도(江界道) 등 5개 군익도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창성군에는 진이 설치되고 첨절제사가 파견되는 한편, 삭주도의 우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 창성부사(昌城府使)는 창성진첨절제사를 겸임하였다. 이 시기 창성진의 병력은 236명이었다(『성종실록』 1년 2월 30일). 이후 1691년(숙종 17) 방어체제 개편으로 인해 창성부사조세웅(趙世雄)을 평안도좌방어사에 임명하면서 창성진은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창성방어사가 상위지휘관으로서 삭주(朔州)와 벽동(碧潼)을 관할하였다. 아울러 18세기 창성진 휘하에는 창주진, 시채진(恃寨鎭) 등 첨사진 2곳과 갑암보(甲巖堡), 운두리보(雲頭里堡), 묘동보(廟洞堡), 어정보, 대길리보 등 권관진 5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진보의 구성에 따라 지휘체제 역시 창성방어사를 중심으로 첨사(僉使) 2명, 권관(權管) 5명, 별장(別將) 6명이 있었다. 별장 6명은 창주진과 권관진 5곳에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창성진 내부가 창성방어사를 중심으로 방영, 산성, 부(府)로 구분되어 있었다. 창성진 내부에는 대솔군관(帶率軍官) 5인,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 각고(各庫) 감관(監官) 14인과 방영 소속으로 방영중군(防營中軍) 1인, 기고관(旗鼓官) 2인, 위장(衛將) 1인, 별장(別將) 1인, 천총(千摠) 1인, 파총(把摠) 1인, 초관(哨官) 4인, 방영군관(防營軍官) 50인, 방영리(防營吏) 3인, 토포군관(討捕軍官) 100인이 있었으며, 산성 소속으로 산성중군(山城中軍) 1인, 좌·우성장(左·右城將) 2인, 천총(千摠) 1인, 파총(把摠) 2인, 기고관 1인, 교련관(敎鍊官) 1인, 초관(哨官) 6인, 수첩군관(守堞軍官) 300인 등이 있었다. 창성부 소속으로는 부기고관(府旗鼓官) 4인, 천총(千摠) 2인, 파총(把摠) 3인, 초관(哨官) 17인, 기패관(旗牌官) 30인, 위전(衛前) 34인, 통인(通引) 15인, 사령(使令) 2명, 군뢰(軍牢) 100명, 관노(官奴) 170구, 비녀(婢女) 167구 등이 있었다.

변천

압록강 변으로부터 평안도 내지로 접근하는 길은 크게 희천(熙川)에서 영변(寧邊)에 이르는 길, 창성에서 삭주와 귀성을 거쳐 영변에 이르는 길, 의주에서 용천과 선천으로 향해 안주에 이르는 길 등 다양하였다. 창성진은 평안도 강변 7읍의 하나로서 조선시대 북방 방어의 최일선에 있었다. 창성진은 1402년(태종 2)에 설치된 이후 세종 연간 이 지역의 방어체제 정비에 따라 읍성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이 지역의 방어체제 정비는 조선후기에도 지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후금의 등장으로 인해 평안도 지역의 방어체제 정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비변사는 강변 방어의 핵심을 벽동-창주-창성-삭주-의주로 이어지는 선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경제가 어려운 상태에서 이 지역의 방어체제를 착실하게 정비하기는 어려웠다. 정묘·병자호란 이후 이 지역의 방어체제는 한동안 정비되지 못하다가 숙종 연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지역에 방어체제는 재정비되었다. 1681년(숙종 7) 창성은 좌로영장(左路營將)으로, 만포를 우로영장(右路營將)으로 삼는 한편 군졸을 각 진장에게 소속시키고 군령도 진영에서 내리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진다. 이후 1697년(숙종 17) 강계와 창성에 각각 좌방어영과 우방어영이 설치되면서 이 지역의 방어체제가 정비되었고, 이러한 두 거점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제는 18세기에도 계속 이어진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 국학자료원, 2014.
  • 이철성, 「17세기 平安道 ‘江邊 7邑’의 방어체제」, 『韓國史學報』13, 高麗史學會,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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