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부(昌城府)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평안도 창성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창성부(昌城府)는 조선 세종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여 설립되었다. 이후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되어 한반도의 북서부 변방 일대의 관문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의주부 창성군(昌城郡)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창성부는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국방상 요충지로 인식되면서 강계, 위원, 이산, 벽동, 의주, 삭주와 함께 강변 7읍으로 불렸다. 조선 건국 초에 국경 인근 고을 여진인들을 통폐합하여 군을 설립하였고, 세종 때 도호부로 승격하여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다른 이름으로 장정(長靜), 이성(泥城)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창성부는 1402년(태종 2)에 창주 일대의 여진인들을 모아 군으로 만들고, 종4품의 지군사를 두어 관할하였다. 1438년(세종 20)에 진을 설치하고 도호부로 승격하면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세종실록』 20년 6월 26일). 그러나 『경국대전』 편찬 당시에는 종3품의 관아이며, 판관(判官)에 대한 기록도 없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당시에는 평안도에 모두 6곳의 도호부가 존재했으나 변방의 국방 강화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속대전』이 편찬될 때는 14곳으로 증대되었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도호부사와 교수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교수를 폐지하였다. 종6품의 교수는 교관으로 지방에서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창성진은 국경을 맞대고 있어 독진 체제로 운영되며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창성부 소속 관원으로는 대솔군관 5명, 좌수 1명, 별감 3명, 각 창고 감관 14명, 방영중군 1명, 기고관 7명, 위장 1명, 별장 1명, 천총 4명, 파총 6명, 초관 21명, 방영군관 50명, 방영리(防營吏) 3명, 토포군관 100명, 교련관 1명, 초관 6명, 수첩군관 300명, 기패관 30명, 산성중군 1명, 좌·우성장 2명, 아전 34명, 통인(通引) 15명, 사령 2명, 군뢰(軍牢) 100명, 관노 170명, 관비 167명이 있었다.

변천

창성부는 고려시대에 장정현(長靜縣)으로 불리다가 1035년(고려 정종 1)에 창주방어사(昌州防禦使)가 되었다. 1231년(고려 고종 18)에 몽골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으며,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이성만호부(泥城萬戶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두어 관할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2년(태종 2)에 이성과 창주(昌州)·벽단(碧團)·음동(陰童)·대소파아(大小波兒)·우농고(亐農庫) 등 각처의 여진인들을 합하여 창성군을 설립하고(『태종실록』 2년 4월 25일), 이성의 우익단련사(右翼團練使)로 하여금 이를 겸하게 하였으며, 후에 지군사를 두었다.

1438년(세종 20)에는 도호부로 승격하여 진(鎭)을 설치하고, 1·2품의 수장(守將)을 두었으며, 판관을 두도록 하였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의주부 창성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