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획사(贊劃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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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지방군의 조련과 군사 업무 감독을 위해 중앙에서 임시로 파견한 관원.

개설

찬획사(贊劃使)는 지방군의 조련과 군정(軍政)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파견된 관원이다. 도체찰사(都體察使)·도순무사(都巡撫使) 등과 같은 유형이다. 차출된 관원의 품계는 종2품~종3품으로 다양하다. 임진왜란 때 처음 등장하였고, 광해군대와 인조대, 숙종대에 일시적으로 파견하였다. 숙종대 이후에는 사례가 확인되지 않는다.

담당 직무

찬획사는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에 충청도에 파견된 이시발(李時發)의 직함으로 처음 나타난다(『선조실록』 29년 12월 8일). 이시발은 그 전해에 병조 좌랑의 지위로 충청도순안어사(忠淸道巡按御史)로 파견되었는데 군사 조련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596년 11월에 장악원(掌樂院) 정(正)으로 승직(陞職)된 뒤 찬획사라는 직함으로 군사를 호령하게 되었다. 찬획사는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동안 찬획사는 일시적으로 충주에 주둔하여(『선조실록』 30년 9월 20일)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예하에 별장과 군관을 두고 포수·살수와 선봉군(先鋒軍) 등을 조련하고 지휘하였으며, 때로는 외적 방비를 위해 군사를 움직여 요해처(要害處)에 복병(伏兵)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 이시발의 뒤를 이어 황신(黃愼)과 한준겸(韓浚謙)이 찬획사로 차출되었다.

이후 찬획사는 나타나지 않다가 광해군대에 북방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서북 변방의 군사 업무를 위해 찬획사를 파견하였다.

찬획사는 관찰사·체찰사(體察使) 등과 함께 관내 지역 수령에 대한 포폄을 시행하거나, 군수 물자의 마련 방안을 강구하였다. 또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변방 지역을 순시하며 군사 시설을 정비하거나 외적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조정에 보고하였다. 찬획사 등을 통해 확보된 정보는 조선의 국방 대책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예하 수령에 대한 사형까지 집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5월 25일).

변천

찬획사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파견된 관원의 직함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찬획사라는 직함이 확인되지 않다가 1596년에 첫 사례가 확인되는데, 이는 명나라 관원의 ‘찬획’이라는 직함에서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명나라에서 파견된 유황상(劉黃裳)은 ‘경략찬획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사무(經略贊畫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事務)’라는 직함이었는데(『선조실록』 26년 3월 20일), 그를 가리켜 유찬획(劉贊劃)이라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도 찬획사라는 명칭이 나타났다.

임진왜란 중에 일시적으로 설치되어 내륙에 파견되었던 찬획사는 이후 광해군대에는 서북 변방의 군사 업무를 위해 파견되었다. 인조대에도 찬획사가 설치되었는데, 이때는 도체찰사부 이외에도 어영청의 관할 아래에 두어 어영찬획사(御營贊劃使)로 불렸다. 또한 관향사(館餉使)가 겸하는 등 다른 직임과 함께 겸임하는 사례도 등장한다. 정묘호란 때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이끄는 분조(分朝)에 체찰사 예하로 찬획사를 두기도 하였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인조 6)에는 윤휘(尹暉)와 이경직(李景稷)을 찬획사로 차출하였고, 이경직을 파주·교하 등 산성의 순시를 위해 일시적으로 파견한 바 있다.

찬획사는 이후 한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1678년(숙종 4)에 폐지하였던 도체찰사부를 재설치하면서 예하에 찬획사를 두었다. 평상시에는 도체찰사부 운영에 참여하다가 일이 있을 경우에는 지방을 순찰하기 위한 것으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상징하는 유서(諭書)와 밀부(密符)를 주었다(『숙종실록』 6년 2월 9일). 1680년(숙종 6) 도체찰사부와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벽오유고(碧梧遺稿)』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