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하라(車河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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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후 동몽골을 구성하는 6만호 중 하나로, 몽골 대칸의 직속 부족.

개설

차하라(車河羅)는 15세기 이후 동몽골의 좌익 3만호 중 하나인 차하르([察哈爾], Čaqar)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이다. 삽한(揷漢)·찰한아(察罕兒)·차한(叉汗) 등으로도 표기된다. 16세기 초에 다얀(Dayan) 칸이 몽골을 통일한 후 동몽골 좌익 3만호의 하나로 대칸의 직속 부락이 되었다. 이리하여 차하르는 몽골의 정치적 중심 만호가 되었고 선부(宣府) 변경 밖에 유목하였다.

16세기 중엽에 몽골의 대칸 다라이순([打來孫], Daraisun)은 알탄 칸이 이끄는 우익 만호의 압박을 피하여 차하르를 이끌고 동쪽 요동으로 이동하여 삼위 우량하이를 침략하면서 시라무렌([西拉木倫], Sir-a mören) 하(河) 유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투멘 칸이 즉위하면서 차하르의 지위가 또 다시 높아져 중심적인 역할을 회복하였다.

17세기 초에 와서 릭단이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한 후 다른 몽골 여러 부족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고 전 몽골의 통합 통치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때 릭단은 ‘차하르 칸’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전의 대칸에 비해 격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릭단은 대내적으로는 몽골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부각하던 후금과 충돌하게 되었다. 릭단 칸은 자신을 배신하고 후금에 항복한 호르친 등 몽골 여러 세력 및 그들을 지원하는 후금에 대항하여 나갔다. 결국 후금의 홍타이지는 릭단 칸을 정복하기 위하여 직접 출전하였고 1634년 릭단 칸은 청해(靑海)로 피신을 가던 중 병사하였다.

그 후 황후 2명은 그의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후금에게 항복하였고 1635년 태자 에제이 홍고르도 후금 군대에게 항복하였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 에제이 홍고르를 사위로 삼았다. 이 사실은 조선 조정에도 전해졌는데, 『인조실록』에서 “차하라의 태자가 한(汗)의 사위가 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인조실록』 16년 8월 4일).

조직 및 역할

원래 차하르 만호는 히식텐(Kesigten), 하구치드(Qaγučid), 아오한(Aoqan), 나이만(Naiman), 수니드(Sünid), 우줌친(üjümüčin), 알락치구드(Alaγčiγud), 헴치구드(Kemčigüd) 등 8개의 오톡으로 구성되었다.

변천

릭단 칸의 사망 후 차하르는 청나라에 복속당하여 호쇼(qosiγu) 형태로 릭단의 후손들의 통치를 받았다. 호쇼는 기(旗)로 번역되는 몽골의 행정단위로 1개의 부족 집단을 일컬었다. 1675년 릭단 칸의 증손 부르니(Bürni)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 차하르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8개의 호쇼로 나누어 청 정부에서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현재 차하르인 대부분은 중국 내몽골에 살고 있으며 몽골국에도 소수의 차하르인들이 살고 있다.

참고문헌

  • Хөрвүүлсэн Ц. Цэрэндорж, Манжийн үнэн магад хууль, Бит пресс, 2009. (Ts. 체렝도르지 역주, 『만주실록(滿州實錄)』, 비트프레스, 2009.)
  • Хөрвүүлсэн Ц. Цэрэндорж нар, Зарлигаар тогтоосон гадаад монгол, хотон аймгийн ван гүнгүүдийн илтгэл шастир, Согоо нуур, 2007. (Ts. 체렝도르지 등 역주, 『흠정외번몽골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 소고오 누우르, 2007.)
  • ШУА-ийн Түүхийн хүрээлэн, Монгол улсын түүх, Адмон, 2003.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편, 『몽골국 역사』, 애드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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