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현시(進賢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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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년(성종 13)에 문무 당하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중시의 일종.

개설

성종이 여러 능과 문묘를 참배한 후 인재를 선발하기 위하여 설행한 시험이었다. 1482년 10월 25일에 인정전(仁政殿)에서 문과 진현시를,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과 진현시를 시행하였다. 중시의 성격을 지닌 시험으로 조선시대에 단 1회만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1482년(성종 13) 성종은 여러 능(陵)과 문묘에 참배하고 나서 중시 시행에 관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세조대 설행된 발영시(拔英試)의 예(例)에 의거하여 이름을 짓도록 하였는데 예조에서 진현시(進賢試)라고 하였다(『성종실록』 13년 9월 26일). 10월 25일에 왕이 인정전에 나아가서 책문(策文)으로 문과를 시험하였다(『성종실록』 13년 10월 25일). 문과에서는 1등에 1명, 2등에 1명, 3등에 2명을 합격시켜 총 4명을 선발하였다. 장원은 주서(注書) 이승건(李承健)이었다. 이어서 모화관에 거둥하여 무과를 시험하였다. 무과 시험은 먼저 보사(步射)에서 200보(步)·육냥(六兩)·포후(布侯)를 시험하고, 그다음은 강서(講書)와 기사(騎射)로 시험하였다. 무과에서는 진암수(陳巖壽) 등 10명을 뽑았는데, 편전(片箭)을 시험하지 않아 등위를 나누지 않았다(『성종실록』 13년 10월 25일). 11월 8일에 진현시 문무과(進賢試文武科) 방방(放榜)을 하여 합격증서인 홍패를 수여하였다(『성종실록』 13년 11월 8일).

법제적으로 중시문과의 시관은 의정 1명, 종2품 이상 2명으로 구성된 독권관(讀卷官)과 당상관 4명으로 구성된 대독관 등 총 7명이었다. 진현시에서는 윤필상(尹弼商)·서거정(徐居正)·임원준(任元濬)·이파(李坡)를 독권관으로 삼았다. 중시무과의 시관은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 당하관 문관 1명과 무관 2명 등 총 6명이었다. 진현시 무과의 시관은 밝혀져 있지 않았다.

진현시·발영시·탁영시는 모두 중시의 일종으로, 시험에 임해서 명명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단 1회만 시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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