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현(鎭海縣)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고려시대 진해현(鎭海縣)은 진주(晉州)의 속현(屬縣)으로 편제되었다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감무(監務)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진해현은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이후 진해현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까닭에, 한때 폐지되어 창원(昌原)과 함안(咸安) 등에 합병되었다가 1639년(인조 17)에 회복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진해현은 진해군으로 변경되었으나, 1908년(순종 1)에 창원군에 합병되어 소멸되었다. 조선시대에 진해현의 중심지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진해현은 고려시대부터 그 연혁이 본격적으로 확인된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에 내속했다고 하므로 설치 시기는 그 이전의 고려초기로 판단된다. 1390년에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진해현은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에 진해현은 진주의 속현으로 존재하다가 고려말기인 1390년에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었을 뿐 진해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려시대에 진해현은 진주의 속현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으며 별도의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 건국 후인 1413년에 감무는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진해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종6품의 무관(武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19명, 지인(知印) 5명, 사령(使令) 6명, 관노(官奴) 7명, 관비(官婢) 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고 기재되었다. 조선시대 진해현의 읍치와 관아는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진해현은 동남 해안에 위치한 까닭에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 까닭에 진해현은 1601년(선조 34)에 폐지되고 함안에 편입되었다. 1617년(광해군 9)에 진해현이 분리되었으나 1627년(인조 5)에 다시 창원에 합병되었고, 1629년(인조 7)에는 함안으로 이속되었다. 1639년이 되어서야 다시 분리 독립되었다. 이후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진해현은 진해군이 되어 진주부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진해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진해군은 1908년에 창원군에 합병되었다(『순종실록』 1년 9월 14일). 조선시대에 진해현과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