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사(鎭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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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을 주둔시켜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17세기에 창건한 강화도의 사찰.

개설

강화 갑곶리에 소재했던 진해사(鎭海寺)의 현재 사찰명은 해운사(海雲寺)이다. 이 사찰은 17세기에 외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강화유수로 있던 신후재가 창건하였다. 1691년(숙종 17) 승려 100명을 진해사에 주둔시켰으며 1692년에는 창고를 지어 병조의 물품을 보관하였다. 1693년에는 금위영(禁衛營)에 소속시켜 금위영의 물품을 보관·관리하도록 하고, 도총섭(都摠攝)을 두어 강화도 각 사찰의 승병(僧兵)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강화도 진해사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위치한 해운사(海雲寺)의 전신이다. 1691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민종도(閔宗道)가 진해사에 승려 100명을 모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명승첩(空名僧帖)으로 승려 50명을 모아 용당곶이[龍塘串] 나루 언덕에 새로 사찰을 지어 외침에 대비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런데 비변사(備邊司)에서 승려들을 모으는 데 폐단이 있으므로 60명으로 제한하여 두 사찰에 나누어 거처하도록 조치하였다(『숙종실록』 17년 윤7월 7일).

1692년에 다시 민종도가 진해사 빈 땅에 창고를 지어 본영(本營)의 잡물(雜物)을 보관하고 병조(兵曹)의 은자(銀子) 30,000냥과 목면(木綿) 500동(同)도 운반하여 관리하도록 건의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숙종실록』 18년 1월 28일).

1693년(숙종 19)에는 동지사(同知事)목창명(睦昌明)이 진해사를 금위영(禁衛營)에 소속시켜 금위영의 물품을 보관·관리하게 하고, 승장(僧將)을 두어 도총섭(都摠攝)이라 부르고 강화 각 사찰의 승병을 통솔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1731년(영조 7)에 진해사 대문(大門)의 누각인 복파루(伏波樓)를 중수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진해사의 피해는 알 수 없으나 금위영의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는 온전하였다(『고종실록』 3년 10월 6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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