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현(鎭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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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진천현(鎭川縣)은 조선 1413년(태종 13)에 설립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550호, 인구가 1,923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58명, 진군(鎭軍) 10명, 선군(船軍) 213명이었다. 토지는 6,599결인데, 이 가운데 논은 3/4이 좀 넘는다. 1895년(고종 32)에 진천군으로 고쳤으며, 1914년에 충청북도 진천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진천현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었다. 다른 이름으로 만노군(萬弩郡), 수지(首知), 신지(新知)라고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흑양군(黑壤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처음에 강주(降州)라고 일컬었다가 뒤에 진주(鎭州)로 고쳤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별호는 상산(常山)이었다. 1005년(고려 목종 8)에 자사를 폐지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청주(淸州)의 임내로 삼았다. 1259년(고려 고종 46)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임연(林衍)의 고향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하여 영(令)을 두었다. 1269년(고려 원종 10)에 진주감무(鎭州監務)로 강등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태종 13)에 진천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경기도로 이속하였다가, 중종 초년에 복구하였다. 진천은 충청도에서 경기도 안성, 용인으로 넘어오는 교통상의 요지이며, 곡창 지대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문관과 무관, 음서 출신을 교대로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었다. 18세기 통계에 의하면, 관아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29명, 지인 21명, 사령 25명, 관노 16명, 관비 9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15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6,163호, 남자 13,916명, 여자 17,069명이었다. 토지는 밭 1,859결 4부 2속, 논은 1,637결 4부였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충주부 관할의 진천군으로 승격하였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충청북도 진천군이 되었다. 1901년(고종 38)의 『진천군양안(鎭川郡量案)』에 의하면 가호는 6,723호, 토지는 3,682결 16부 4속이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진천군양안(鎭川郡量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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