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목(晋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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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중심 시가지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진주목(晉州牧)은 삼국시대의 거열성(居列城)에서 기원한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 9주 중 하나인 강주(康州)의 주치(州治)가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주치로서의 강주는 영현(領縣) 두 곳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는 진주목이 되었으며, 9개의 속군현(屬郡縣)을 관할하는 대읍으로 편성되었다. 진주목은 경상도의 계수관(界首官) 세 곳 중 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진주는 조선 건국 직후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는 진주를 포함하여 목이 단 세 곳밖에 없었으므로 진주의 지역적 중요성은 높게 평가되었다. 진주목에는 목사(牧使)가 임명되었으며, 초기에는 판관(判官)과 교수(敎授) 등이 함께 파견되었으나, 후기에는 두 직책이 모두 폐지되었다. 진주에는 1603년(선조 36) 이래로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이 위치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진주목은 진주군이 되어 23부의 하나인 진주부(晉州府)의 치소로 설정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진주군은 경상남도의 관찰사영(觀察使營)이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의 읍치는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중심 시가지에 위치한 진주성과 그 인근 지역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진주목은 삼국시대의 거열성 혹은 거타(居陀)에서 기원한다. 662년(신라 문무왕 2)에 신라가 차지하여 거타주(居陀州)를 두었다가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청주총관(菁州摠管)을 설치하였다. 경덕왕 때 강주(康州)로 개칭하였으며, 혜공왕 때 다시 청주(菁州)가 되었다가 이후 강주로 환원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강주라 부르다가 983년(고려 성종 2)에 12목을 설치할 때 처음으로 진주라 하고 목을 두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12주 절도사 중 하나가 되어 진주 정해군(定海軍)이라 하였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다시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로 승격하였으나, 1402년에 다시 진주목으로 삼았다.

조직 및 역할

진주목은 신라 경덕왕 때 강주라 불렸으며, 신라 9주 중 하나인 강주의 주치가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강주에는 주의 장관인 도독(都督)이 파견되었다. 한편 강주는 가수현(嘉樹縣: 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일대)과 굴촌현(屈村縣) 두 곳의 영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강주는 진주로 개칭되고 진주목으로 중시되었다. 9개의 속군현을 거느렸으며, 경주 및 상주와 함께 경상도의 세 곳 계수관 중 한 곳으로서 높은 위상을 지녔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진주목으로 편제되었으며, 목사가 파견되는 등 지역 중심지로서 진주목의 역할과 비중은 여전히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 목사가 임명된 고을은 진주와 상주, 성주(星州) 단 세 곳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진주의 중요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진주에는 목사가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진주목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의 영역은 기존 고려시대의 진주 직속 영역 외에 고려시대의 반성현(班城縣: 현 경상남도 진주시 반성면 일원), 영선현(永善縣: 현 경상남도 고성군 영현면 일원), 악양현(岳陽縣: 현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일원) 3개 속현의 영역을 합병하였으며, 화개부곡(花開部曲: 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일원)과 살천부곡(薩川部曲: 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일원)의 영역 역시 진주에 완전 합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정3품의 목사와 종5품의 판관, 종6품의 교수가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3품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이 목사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270명, 인리(人吏) 73명, 지인(知印) 23명, 사령(使令) 42명, 군뢰(軍牢) 14명, 관노(官奴) 60명, 관비(官婢) 58명이 편성되었다. 즉 판관과 교수는 이때 이미 폐지되었다. 19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정3품의 목사가 임명되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판관과 교수는 폐지된 것으로 나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진주의 호수가 1,628호, 인구는 5,906명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에 진주목의 호수가 13,966호, 인구는 65,098명으로, 그중 남자가 28,548명이고, 여자가 36,550명이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진주에 5개의 면과 72개의 리가 기재되었는데, 5개의 면은 동면·남면·북면 각 한 곳과 서면 두 곳으로 사실상 방위 면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방리(坊里)의 숫자가 69개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의 영역이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는 물론 산청군과 하동군·사천시·고성군·남해군 등의 일부 지역까지 포괄할 정도로 넓었으므로, 『호구총수』의 리와 『여지도서』의 방리는 사실상 타 지역의 면과 동일한 범주로 이해할 수 있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진주목의 호수는 15,028호, 인구는 69,495명으로, 남자는 33,498명, 여자는 35,997명이었다. 1910년(순종 3)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진주의 호수는 18,832호이고, 인구는 90,548명으로, 그중 남자가 46,459명, 여자가 44,089명이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창원(昌原)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된 까닭에 1603년(선조 36)에 진주로 옮겼으며(『선조실록』 36년 5월 2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와 진주목사를 겸하게 하였다. 경상우병영은 이후에도 진주에 계속 위치하였으나, 1635년(인조 13)에 진주와 병영(兵營)을 나누어 다시 별도로 진주목사를 두었다(『인조실록』 13년 7월 11일). 1702년(숙종 28)에는 진주의 영역이던 악양(岳陽), 화개(花開), 진답(陳畓), 적량(赤良) 4개 지역을 하동에 이속시켰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진주목은 진주군이 되어 진주관찰사부 즉 진주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1896년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진주군은 경상남도 관할하의 1등군으로 편제되었고, 경상남도관찰사영의 소재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