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현(振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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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진위현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진위현(振威縣)은 고려시대에 수주(水州: 현 수원)에 소속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가 뒤에 현령(縣令)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용인, 영평, 양천, 김포 등과 함께 현령 소재지가 되었다. 1398년(태조 7)에 충청도에서 경기좌도로 옮겨 소속되었다. 영조 때 역적의 고향이라 해서 읍호가 강등되었지만 10년 후에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공주부 진위군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진위현은 본래 고구려부산현(釜山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진위로 고쳐서 수주(水州) 속현으로 만들었던 것이 고려 때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고려 명종 2년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가 그 뒤에 영(令)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현령을 두었다. 1398년(태조 7)에 충청도에서 떼어서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는 문종 때 관제를 정하여 현(縣)에는 7품 이상의 현령을 두었고, 1354년(고려 공민왕 2)에 경관 7품 이하로 했다가 뒤에 안집별감으로 이름을 고쳐 5·6품의 관리를 임명하였다. 창왕 때 다시 고쳐 현령이라 하고, 품계는 그대로 5·6품으로 하였다.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진위현에는 종5품의 현령 1명과 종9품의 훈도(訓導)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으나, 무록관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향약이 활발해지면서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6품의 현령 1명이 있었고,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3명, 아전 15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임무는 그 실제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이며,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진위현은 고려시대 수주에 소속되었고, 1172년(고려 명종 2)에는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에서도 고려의 편제를 그대로 계승하여 현령을 두었다. 1424년(세종 6)에 수원 관내의 송장(松莊) 87호, 부산(釜山)과 청호역(菁好驛)의 59호, 용인현(龍仁縣)·의신현(義信縣) 6호를 떼어서 진위에 소속시켰다. 1433년(세종 15)에 수원부의 속현 영신(永新)을 진위에 옮겨 소속시켰다. 1738년(영조 14)에 읍호가 복구되었는데,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읍호가 강등되었다가 1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영조실록』 14년 1월 11일). 1795년(정조 19)에는 진위현이 화성의 속읍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공주부 진위군으로 승격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진위현(振威縣)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진위(振威)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