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문(進善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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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마당을 감싸고 있는 서쪽 문인 중정문(中正門).

개설

1405년(태조 5) 창덕궁 창건과 때를 같이하여 건립되었다. 명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진선문 건립 이후에 금천의 석교가 만들어졌다. 이후 창덕궁의 궁장(宮墻)을 두르고 도성 좌우 행각이 완성되었다. 이때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함께 완성되었으므로 돈화문보다 건립 시기가 이른 것으로 보인다.

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기 위한 중문이며 인정문(仁政門), 숙장문(肅章門)을 포함한 행각으로 둘러싼 중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전의 조정 마당이 예제(禮制)의 중심 공간이라면 인정문 밖에 마련된 이 마당은 주된 행례의 행위를 위한 마당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정 마당이 신성성을 가진다면 이 마당은 추국(推鞫)하거나 벌주는 장소로, 그 외 국정을 처리하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태종실록』 9년 10월 1일).

진선문의 편액은 원래 동래군(東萊君)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 1999년 진선문이 복원되면서 편액은 서예가 정도준씨의 글씨로 새로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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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가 조금 걷다 보면 우측으로 꺾어 들어 금천교를 건너도록 어도(御道)를 놓아 동선을 유도한다. 이 금천교를 건너 정면 일직선상의 축에 놓여 있는 문이 진선문이다. 진선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숙장문이 놓여 있고 좌측에 인정문이 놓여 있어 다시 한 번 방향을 틀어야 조정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진선문 마당에는 내병조(內兵曹), 전설사(典設司), 상서원(尙瑞院), 호위청(扈衛廳) 등 문을 지키는 부서와 그 부속실들이 행각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진선문 앞에는 신문고를 달아 억울한 사연을 듣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또 왕이 죄인을 벌할 때도 이곳 진선문 안마당에서 친히 신문(訊問)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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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1908년(융희 2) 일본의 개입으로 인정전 영역에 정원이 만들어졌고 자동차가 드나들도록 이 일대를 일제히 정리하였다. 이때 인정전 외행각 마당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1996년 창덕궁 복원 사업으로 진선문을 비롯해 새로이 외행각 마당을 갖추게 되었다.

형태

진선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삼문이며 내외5포로 구성된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3칸 중 가운데 칸은 15척, 좌우 협칸은 13척의 규모이고 문의 좌우에 행각이 연이어 놓여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서인의 복장으로 몸을 피해 달아났으나, 반정군에 의해 잡히고 진선문 밖에 감금되었다. 뒤이어 광해군의 세자인 폐동궁을 붙잡아 같은 장소에 감금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묵재일기(默齋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평일기(延平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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