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군(珍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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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고산감무(高山監務)가 황산군(黃山郡)의 관할이던 진동현(珍同縣)을 겸임하였다. 1393년(태조 2)에 만인산(萬仞山)에 태조의 태(胎)를 모신 곳이라 하여 진주군으로 승격시켰다. 1409년(태종 9)에 진산군(珍山郡)이 관할해 오던 1현과 2소를 진산군에 편입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진산군으로 고쳤다. 1455년(세조 1)에 진산군이 전라도 전주도(全州道)의 좌익을 맡았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진산군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는 백제의 진동현이었는데 신라에 와서 황산군의 관할 아래 있다가 고려에 와서 진례현(進禮縣)이 되었다. 『고려사』에는 1390년에 고산감무가 이곳을 겸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393년에 만인산에 태조의 태를 모신 후 진주(珍州)로 승격시키고 지진주사(知珍州事)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진산군이 관할해 오던 1현과 2소가 진산군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현은 완산(完山)이며, 2소는 금암(金岩)과 동계(銅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413년에 진산군으로 고쳤다고 되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에는 그 시기가 1412년(태종 12)으로 되어 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군에 종4품 군수(郡守)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군수는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진산군수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군수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군수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진산은 전주도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조선후기에는 여산에 전라후영(全羅後營)이 설치되었다. 후영(後營)의 속읍은 여산·익산·고산·금산·진산·용안·함열·임피·옥구·용담 10곳이며, 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4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317명, 당보군(塘報軍) 117명, 수솔군(隨率軍) 629명으로 되어 있다.

1895년에 8도 체제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진산군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진산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금산군지』, 금산군지편찬위원회, 2011.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