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복시(進士覆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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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부의 제술 능력을 시험 보는 진사시의 최종 단계 시험.

개설

진사시는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며 문장의 제술(製述) 능력을 시험하였다. 초시에 합격해야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 시기에 따라 식년시와 증광시로 구분되나 시험의 절차나 방법은 동일하였다. 진사초시 합격자 700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복시 합격자 100명을 선발하였다. 합격자에게는 합격증서인 백패(白牌)를 수여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에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국초에는 60년 동안 생원시만 설행하였다. 그런데 애초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자를 선발하던 생원시가, 선초의 교육 기회 양적 확대 정책의 효과로 지방 각 군현에 향교가 신설되고 문풍이 진작됨에 따라 지원자가 급증하게 되자, 1414년(태종 14)에 두 단계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가리게 되었다(『태종실록』 14년 1월 20일). 즉, 한성시와 향시를 초시로 삼고, 초시에 합격한 사람을 대상으로 복시를 보게 하여 급락을 정하였다. 폐지되었던 진사시가 1453년(단종 1)에 완전히 부활하여 제도화되면서, 진사시도 생원시처럼 초시와 복시 두 차례의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가리게 되었다.

내용

진사시는 시험 시기에 따라 식년시와 증광시로 구분되었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씩(1번씩) 자(子)·오(午)·묘(卯)·유년(酉年)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었다. 식년 전해 가을에 초시를 치르고 식년 봄에 복시를 치렀다. 증광시는 왕의 즉위를 기념하거나 나라에 경사가 겹쳤을 때 실시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식년시와 증광시는 시험 시기만 다를 뿐 시험 과목, 선발 인원, 시행 방법은 같았다.

진사복시(進士覆試)는 한성시 합격자 200명, 향시 합격자 500명과 초시에 해당하는 승보시(陞補試)·합제(合製)·공도회(公都會) 합격자들이 응시하여 최종 합격자 100명을 선발하였다.

복시에 응시하려면 녹명(錄名)을 해야 했다. 녹명을 하기 전에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앞에 펴 놓고 읽게[臨文考講] 하는 학례강(學禮講)을 통과해야 했다. 시험은 처음에는 예조가 주관하였으나 단종 이후에는 예조와 성균관이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진사복시의 시험 과목은 초시와 동일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부 1편, 고시(古詩)·명(銘)·잠(箴) 중 1편이었다가 『속대전』에서는 명과 잠을 폐지하고 부 1편, 시 1편으로 바꾸었다.

복시에서 선발된 100명은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 등 세 등급으로 나누어 합격시켰다. 19세기 후반 정원을 늘려 뽑은 경우에 1등·2등은 변화가 없었고 늘린 인원은 모두 3등에 등제하였다. 합격자에게는 합격증서인 백패를 수여하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변천

진사복시는 시험 과목 말고는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운영되었다. 시험 과목은 1453년(단종 1)에 제도화될 때 고부(古賦) 1편, 고시·율시(律詩) 중에서 1편씩 내도록 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부 1편, 고시·명·잠 중 1편으로 법제화하였다가 『속대전』에서 명과 잠을 폐지하고 부 1편, 시 1편으로 바꾸었다.

사회적으로 조선초기에는 성균관에서 생원이 먼저 앉고 다음에 진사가 앉았다. 진사시를 나중에 설치하였고, 국가정책이 사장(詞章) 시험인 진사시보다 경학(經學) 시험인 생원시를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사회적으로는 사장학적 능력을 숭상하는 풍토가 강해 시간이 흐를수록 생원보다 진사를 더 선호하였다. 철종 이후에는 생원보다 진사를 훨씬 많이 뽑았고,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도 자신들을 진사라고 부를 정도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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