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병법석(鎭兵法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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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병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호국경전을 강독하는 법회.

개설

병란을 진압하기 위한 불교 법회로 진병법석[鎭兵法席]과 진병도량[鎭兵道場]이 있었다. 또 명칭은 다르지만 인왕도량·백고좌도량·문수도량 등도 다 외적이나 병란을 진압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개설되었다. 진병법석이라는 명칭으로 개설된 사례는 1223년(고려 고종 10)에 처음 나타나며, 고려말에 몇 차례 개설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 태조가 각 도의 절로 사람을 보내어 병란을 막으려고 진병법석을 베풀었다(『태조실록』 6년 9월 19일). 이때 진병법석이 개설되는 동기는 보름 전에 일어난 왜구의 침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같은 달 4일 경기우도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김을보(金乙寶)가 왜선 1척을 잡아 머리 14급(級)을 베고 24명을 생포하자, 사농경(司農卿) 김로(金輅)를 보내어 비단과 술을 하사하였다(『태조실록』 6년 9월 4일). 이는 불교의 호법신중인 사천왕 등이 국가를 외호해준다는 사상에 근거한다. 특히 불교의 호법삼부경으로 널리 알려진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 『금광명최승왕경』, 『묘법연화경』 등의 호국사상에 의지한다. 이를테면 『금광명최승왕경』「사천왕호국품」에는 경전을 염송하는 공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나라 왕이 이 경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칭찬하고 공양하며, 이 경을 지니는 사부대중은 깊은 마음으로 옹호하여 괴로움을 여의게 하며, (중략) 이 경의 위신의 힘으로 이웃 적국에는 다른 원수가 생겨 그 경계를 침입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모든 재난이 많고 질병이 유행할 것입니다. 이 때 왕이 이것을 보고 나서 곧 4병을 거느리고 저 나라로 향하여 쳐서 벌하고자 하면, 저희들은 그때 당연히 권속과 한량없고 가없는 야차 모든 신과 함께 각기 스스로 몸을 숨겨 가지고 옹호하여 도와서 저 원수 대적으로 하여금 자연히 항복하게 하여 다시는 감히 와서 그 나라 변경에도 이르지 못하게 할 텐데, 어찌 다시 병정과 창칼로써 서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또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봉지품」에도 "사방의 도적이 침입하여 나라 안팎에 병사가 다투어 일어나 백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등 7가지 재난을 당할 때 이 반야바라밀다를 받아 가지고 해설하면 재난이 곧 없어지고 국토가 안락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특히 이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은 국왕에게만 부촉한 경전이었다.

절차 및 내용

진병법석이 어떤 경전에 근거하여 설행되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고려 우왕 때나 조선 태조 때 전국의 사찰에 사람을 보내어 진병법석을 개설한 것으로 볼 때, 법석의 성격에 상응하는 경전을 독송하는 법회였을 것으로 보인다.

법회의 절차는 대체로 하루 두 차례 상단에 청해 모신 불보살과 제천신중에게 공양을 올리고 거불(擧佛)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마지막으로 재난의 소멸을 축원(祝願)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법석이나 도량에는 중생의 지혜를 상징하고 보살국토를 수호하는 내호(內護)와 현실적 토지를 의미하는 중생국토를 수호하는 외호(外護)의 기능이 담겨 있으므로 진병법석은 지혜의 증장과 재난의 소멸을 성취하기를 기원하는 법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
  • 서윤길, 『한국밀교사상사』, 운주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