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소(鎭撫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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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에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와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를 줄여서 이르는 말.

개설

삼군진무소보다 앞서 있던 군령기관은 1393년(태조 2)에 설립된 의흥삼군부였다. 의흥삼군부는 1400년(정종 2) 사병의 혁파가 이루어질 때까지 존속하다가 1409년(태종 9) 8월에 삼군진무소로 바뀌었다. 삼군진무소는 1457년(세조 3) 4월에 오위진무소로 개칭되었다. 그 후 1466년(세조 12) 1월에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부로 개칭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3년에 설립된 의흥삼군부는 1398년 8월의 왕자의 난 때까지 사적 영속관계에 있는 모든 군사를 형식적으로나마 일원화된 체계에 의해 파악하려는 집권화 시책에서 발전되었다. 1400년에 사병이 혁파되면서 중추원과 의흥삼군부를 합속시켜 녹관을 갖는 삼군부로 확립했다. 그리고 삼군부의 요원은 도평의사사를 고친 이름인 의정부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태종대 삼군진무소가 설치된 것은 병조에 치우쳐 있는 병권에 대해서 “병조는 모두 유신(儒臣)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배려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후 삼군진무소는 세종대 전반부터 문종·단종대까지 병조와 더불어 군령상의 기능을 갖고 존속하면서 군대를 장악했다. 삼군진무소는 1457년(세조 3) 5사가 5위에 병합되어 부대편성과 진법체제가 일치하게 되면서 오위진무소로 개칭되었다. 오위진무소는 1466년(세조 12) 1월에 오위도총부로 개칭되면서 그대로 『경국대전』에 등재되었다.

조직 및 역할

태조대 의흥삼군부는 강력한 군령기관이었다. 그 구체적 기능은 중앙의 십사(十司)에 대한 감독·지휘 및 시위패에 대한 지휘 감독이었다. 1398년(태조 7)에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1400년 사병 혁파 후 대규모의 관제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때에 삼군부 삼군은 중·좌·우로 각각 구분되어 통할되었다. 1409년 삼군진무소가 설치되고, 도진무·상진무·부진무 각 1인과 진무 27인을 임명했다. 삼군진무소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중앙군으로서의 오위체제가 확립되면서였다. 1451년(문종 1) 7월에 12사가 5사로 되자 삼군은 중군 예하에 3사, 좌·우군 예하에 각각 1사를 두게 되었다. 그 후 1457년(세조 3) 4월에 5사가 5위에 병합되어 부대편성과 진법체제가 일치되면서 삼군진무소는 오위진무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1466년(세조 12) 1월에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부로 개칭되면서 군령기관으로서의 오위도총부가 확립되었다. 오위도총부에는 도총관과 부총관 합 10인이 있었다. 삼군진무소 때의 도진무가 이렇게 바뀐 것이다. 그 밖에 경력·도사가 각각 4명씩 있어서 행정상의 실무를 장악했다. 타관으로 겸임하게 되어 있는 도총관·부총관의 위계는 각각 정2품, 종2품이었다. 오위도총부는 오위의 군무를 장악하여 처리했다. 오위는 평시에는 병종별로 입직·행순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다.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은 이것을 총지휘했다.

변천

오위와 병조는 군정상 상하의 관계에 있었다. 군령상으로 오위도총부의 지위는 확고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은 종실 중에서 또는 고위 관리 중에서 10명이 겸직하는 것이었고, 그 관원으로도 경력과 도사가 몇 명 있을 뿐 관서로서의 구성은 그다지 짜임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오위 병력에 대한 입직과 행순을 감독하는 것이 실제의 직무였다. 반면에 병조는 군정을 총괄했다. 때문에 명령을 전달하는 모든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또한 국방 정책 전반에 대한 기획과 집행을 관장했다. 그러므로 오위도총부에 비해 사실상의 영향력이 대단히 비대했다. 따라서 군정상으로도 상하관계였지만 군령상의 지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위에 대한 군령권은 오위도총부에 있었다. 하지만 병조는 군정상 오위를 속아문으로 거느렸다. 따라서 오위에 대해서 병조와 오위도총부는 횡적인 협조관계에 있었다.

참고문헌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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