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강성(鎭江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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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대 압록강 연안에 있던 성.

개설

진강성은 명·청대에 조선에서 북경으로 가기 위한 첫 접경지이다. 명대에는 구련성(九連城)으로 불리었으나, 명말에 증축(增築)하면서 진강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 및 용도

진강성은 현재 요녕성(遼寧省) 단동시(丹東市) 진안구(振安區) 구련성진(九連城鎭)으로 단동 시가지 중심부로부터 동북으로 12㎞ 지점에 있다. 북으로 진동산(鎭東山)이 있고, 명·청대 북경으로 가는 사행로(使行路)의 시작점이다. 이곳은 사행단의 숙박과 무역을 위한 공간이었다.

변천 및 현황

진강성은 금대에 파속부로(婆速府路), 원대에 파사부(婆娑府) 순검사(巡檢司)의 치소가 있던 곳이었다. 이후 명조에 구련성으로 개칭되었고, 1596년(만력 24)에 진강성을 증축하였다.

조선은 명과 청에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와 같은 정례 사행,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 등의 임시 사행을 보냈다. 조선의 사행단은 요동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의주에서 강을 건너 20리쯤(약 8㎞) 지나 진강성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진강성은 조선에서 북경으로 가는 첫 접경 지역이었다.

보통 사행이 진강성에 도착하면, 탕참(湯站) 등 아문(衙門)에 보고단자(報告單子)를 전하는 것을 예로 하였다. 이후, 동팔참(東八站)을 거쳐 북경으로 왕래하였다. 따라서 각종 사행록에 진강성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은 단순히 사신단의 기착지일 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의 교류지이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은 임진왜란과 기황(飢荒) 등으로 요동의 미곡(米穀)을 수입하기 위하여 1593년(선조 26)에 명과 합의하여 중강개시(中江開市)를 개설하였다. 이때 중강개시를 조선은 의주, 명에서는 진강성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밤이 되면 서로 약탈하거나 법 이외 금지된 물품을 사고파는 등 여러 폐단이 발생하였다(『선조실록』 33년 11월 16일). 따라서 조선 내부에서 중강개시의 폐지가 논의되었지만 곧바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외에도 진강성의 관리가 의주와 문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4년 11월 16일) (『선조실록』 36년 6월 17일).

현재 진강성의 터가 남아 있다. 즉, 성지(城址) 4곳, 요망대(暸望臺)가 5곳이다. 제1성지는 구련성촌 서측에 있고, 방형(方形)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러나 명대의 성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남쪽의 성벽은 둘레 225m, 높이 약 4m의 규모로 남아 있고, 동문과 서문이 있다. 이곳에서 금과 원대의 백자(白瓷), 흑자(黑瓷), 청자편(靑瓷片), 유리주(琉璃珠), 북송(北宋)의 ‘숭정통보(崇禎通寶)’, 석구(石臼), 와편(瓦片) 등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해동역사(海東繹史)』
  • 『백사집(白沙集)』
  • 『도곡집(陶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강한집(江漢集)』
  • 『연행록(燕行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誌)』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임기중, 『조선외교문학집성(연행록편)』, KRPIA, 2004.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國家文物國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이철성, 「조선 후기 鴨綠江과 柵門사이 封禁 地帶에 대한 역사·지리적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23, 2009.
  • 이철성, 「조선후기 무역상인과 정부의 밀무역 대책-사행무역을 중심으로-」, 『사총』 5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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