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直指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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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종의 태봉을 수호한, 경상북도 김천시 황악산의 사찰.

개설

직지사(直指寺)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황악산(黃嶽山)에 있는 절이다. 5세기 아도(阿道) 화상(和尙)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하나 신빙성은 없다. 고려시대에 절이 크게 중창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직지사 뒤편에 정종(定宗)의 태봉(胎封)이 지정되며 사격(寺格)이 상승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전소되었지만, 이후로 꾸준히 중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원

직지사는 418년(신라 눌지왕 2)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 이름을 직지사(直指寺)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는, 아도 화상이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로 불렸다는 설이다. 다음으로, 고려초에 능여(能如)가 절을 중창할 때 절터를 측량하기 위해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선종의 가르침인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645년(신라 선덕여왕 14) 자장(慈藏)이 중창하고, 930년(신라 경순왕 4) 천묵(天默)이 중수했다.

변천

(1) 고려시대

936년(고려 태조 19) 능여(能如)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크게 중창하였다. 당시의 주요 전각으로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 대비로금당(大毘盧金堂), 극락전(極樂殿), 원통전(圓通殿), 지장시왕전[地藏十王殿], 응진전(應眞殿), 설법전(說法殿), 선등각(禪燈閣), 대장전(大藏殿) 등이 있었다. 대장전비(大藏殿碑)에 의하면 직지사에는 금자사경(金字寫經) 593함이 있었다고 한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종(定宗)의 태봉(胎封)이 직지사 뒤편에 자리하였다(『정조실록』 8년 9월 15일).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와 공주가 태어나면 전국의 명당자리를 선별하여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거쳐 아기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胎室)을 조성하였다. 태실이 위치한 고을은 전에 비해서 그 격(格)이 상승되기 마련이었다.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王位)에 즉위하면 태봉(胎封)으로 봉해지면서 다양한 시설물이 추가로 조성되고, 그곳 고을의 격은 한층 상승되었다. 따라서 직지사 뒤편에 정종의 태봉이 지정되어 직지사의 사격(寺格)도 전에 비해 현격히 상승되었을 것이다. 정종대인 1399년(정종 1)에 절이 중건되었다. 직지사의 중건은 인근에 정종의 태봉이 지정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1488년(성종 19) 학조(學祖)가 절을 중수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 왜병들의 방화로 43동의 건물 중 천불전(千佛殿), 천왕문(天王門), 자하문(紫霞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이때 법당 앞에 있던 대형 5층 목탑도 소실되었다.

1602년(선조 35)부터 70여 년에 걸쳐 절을 중건하였다. 조종저(趙宗著)가 쓴 직지사사적비(直指寺事蹟碑)에 의하면 당시의 규모가 8전(殿), 3각(閣), 12당(堂), 3장(藏), 4문(門)에 정실(正室)이 352칸에 달하고, 부속 암자는 26개였다고 하였다. 직지사가 당대의 거찰로 자리잡은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로 사세가 기울기 시작해 퇴락을 거듭했다.

(3) 근현대

1966년부터 1981년 10월까지 10동의 건물을 중건하고 10동을 이건(移建)하였으며 9동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 1735년(영조 11)에 태감(泰鑑)이 중건한 대웅전과 천불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용진전, 명부전, 사명각, 범종각,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300여 평이 넘는 천불선원(千佛禪院)과 요사채 등이 있다.

부속 암자로 은선암, 명적암, 운수암, 백련암, 중암, 삼성암, 북암 등이 있다. 현재 직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문화재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 보물 제319호)은 직지사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높이 1.62m에 이르는 이 불상은 본래 절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다.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제606호)과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제607호)은 같은 양식과 크기로 높이 5.4m에 이르는 통일신라대의 석탑이다.

대웅전 삼존불탱화(三尊佛幀畫, 보물 제670호)는 약사후불탱, 석가모니후불탱, 아미타후불탱 등 6m가 넘는 탱화로 1744년(영조 20)에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 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와 안정감 있는 색감 등이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청풍료 앞 3층석탑(보물 제1186호)은 본래 구미 강락사지(江洛寺址)에 있던 석탑이었지만, 1980년에 지금의 직지사로 옮겨왔다.

이밖에도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권 제6~10(보물 제1241호), 석조나한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등이 유물이 있다.

직지사사적비(直指寺事蹟碑)는 직지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681년에 건립되었다. 크기는 폭 130㎝, 두께 30㎝, 높이 419㎝로 찬자는 조종저(趙宗著)이고 글씨는 낭선군(朗善君)이 썼다.

참고문헌

  • 「직지사사적비(直指寺事蹟碑)」
  • 김형우 외, 『한국의 사찰』, 대한불교진흥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