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현(稷山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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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직산현(稷山縣)은 고려시대에 천안의 속현이었다. 고려중기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1413년(태종 13)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15세기에 호수는 535호, 인구는 2,111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40명, 선군(船軍) 254명이었다. 토지는 5,446결이었다. 인구에 비해 경작 면적이 넓고 논이 밭보다 많은 지역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직산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에 천안군으로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직산은 고읍(古邑)으로 고대부터 지역의 중심지였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目支國)이 있던 곳이다. 백제의 건국지인 위례성이 직산이었다는 설도 있다. 고구려가 점령한 뒤에 사산현(蛇山縣)을 설치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했고, 지금의 안성 지역인 백성군(白城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초에는 직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천안(天安)의 임내로 삼았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다시 지직산군사(知稷山郡事)로 승격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3년(태조 2)에 조선에 사신으로 온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 최연(崔淵)의 요청으로 군으로 승격시켰다(『태조실록』 2년 7월 13일).

고려시대에 하양창(河陽倉)이 있던 곳을 경양현(慶陽縣)으로 승격하고 감장관을 두었는데, 조선 1396년(태조 5)에 경양현을 혁파하고 직촌으로 삼았다. 1401년(태종 1)에 다시 감무로 강등하였고, 1413년에 현감으로 고쳤다. 1505년(연산군 10)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했다가 중종이 즉위하면서 충청도로 환원시켰다. 조선에서는 현에 불과했지만, 전통적으로 행정과 경제 면에서 요지였다. 충효와 정절을 발휘하는 사람이 많고, 서로 돕고 사는 인정이 두터운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역민의 단결력이 강한 만큼 토착세력과 향리세력의 힘이 센 곳으로도 유명했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문과 출신과 남항(南行) 출신을 함께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었다. 관속은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28명, 사령 26명, 관노 29명, 관비 19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도 현을 유지하였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는 13개 면으로 편성되었다. 가호는 편호 3,150호, 인구는 남자 5,489명, 여자 7,392명이었다. 토지는 밭 3,716결, 논 2,122결이었다. 1895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천안군에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