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直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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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戰國)~강호(江戶) 시대 비전(肥前) 지방의 대명(大名)·좌하번(佐賀藩)의 번조(藩祖).

개설

비전국(肥前國)의 유력 무사가문인 용조사씨(龍造寺氏)의 가신이었다. 1584년 용조사륭신(龍造寺隆信)이 도원(島原) 전투에서 전사하자, 용조사씨 가신단의 합의하에 용조사씨의 영국(領國)을 위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풍신수길(豊臣秀吉)에 신종하여 기득권을 인정받았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 출진하였다. 풍신수길 사후에는 덕천가강(德川家康)으로부터도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특히 1607년 용조사륭신의 직계 후손인 용조사정가(龍造寺政家), 고방(高房) 부자가 서거하자, 좌하번은 명실상부 과도씨(鍋島氏)의 영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610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1618년 8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가계

16세기 이전 과도씨의 가계는 불분명하다. 과도씨 가독(家督)의 통자(通字), 즉 특정 가계의 인물의 본명에 관례적으로 사용하던 글자로는 본래 ‘경(經)’, ‘청(淸)’, ‘방(房)’ 등이 쓰였으나, 직무 이후 주로 ‘무(茂)’가 사용되었다. 직무의 지위는 아들 승무(勝茂)와 그 후손들이 이어갔다.

활동 사항

1538년 비전국 좌하군 본장촌에서 과도청방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에 천엽씨(千葉氏)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가문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10년 뒤 본가로 복귀하여 주군 용조사륭신(龍造寺隆信)에게 신종하였다. 1570년 금산(今山) 전투에서 대우씨(大友氏)를 격파한 것을 계기로 무장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1584년 용조사륭신이 전사하자, 용조사씨 가독직(家督職)을 위임받아 한층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구주(九州) 정벌에 협조하여 일찍이 신임을 얻었으며, 이를 상징하듯 1589년에는 아들 승무(勝茂)와 함께 풍신 성을 하사받았다. 이에 『조선왕조실록』에도 ‘풍직무(豊直茂)’ 혹은 ‘풍신직무(豊臣直茂)’로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용조사씨 무사단을 이끌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주장(主將)으로 하는 두 번째 부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임하여 함경도로 진공하였다.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594년 강화교섭 과정에서는 경상도순변사이빈과 접촉하기도 하였으며(『선조실록』 27년 11월 18일), 정유재란 때는 김해를 근거지로 삼아 죽도왜성(竹島倭城)을 축조하였다.

직무는 이른바 ‘도자기전쟁’의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 훗날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李參平)을 연행하여 유전(有田) 지역에 정착하게 하였다. 이삼평은 직무의 보호하에서 도자기 생산에 매진하였는데, 그의 휘하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청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유럽으로의 수출길이 막힌 중국산 도자기의 대용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1658년에 창건된 유전의 도산신사(陶山神社)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 직무와 더불어 이삼평이 제신(祭神)으로 모셔져 있다. 유학자로서 그 재능을 인정받은 홍호연(洪浩然)도 직무가 정유재란 시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데려온 인물이다.

한편, 정유재란 직후 일본열도는 내전에 휩싸였다. 풍신수길 사후의 정국운영 방침을 놓고 유력 대명들과 풍신씨 가신들이 대립하여 두 파로 갈렸던 것인데, 두 파의 대립은 결국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로 발전하였다. 직무의 아들 승무는 본래 석전삼성(石田三成)이 지휘하는 서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이끄는 동군에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직무는 승무의 군대를 전선에서 이탈시키는 한편, 덕천가강에게 접근하여 화해를 모색하였다. 덕천가강은 화해의 조건으로 서군 측 대명을 공략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직무는 입화종무(立花宗茂)를 공략하는 등 구주 방면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결과 직무는 덕천가강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하여, 35만여 석의 영지도 추인받았다.

그런데 직무의 정치적 위상은 엄밀히 따지면 용조사씨의 유력 가신에 불과하였다. 1584년 용조사륭신의 전사 이래로 좌하번을 실제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직무와 그의 아들 승무였지만, 용조사륭신의 직계 후손인 용조사정가(龍造寺政家), 고방(高房) 부자는 역시 분란의 씨앗이었다. 실제로 고방은 용조사씨의 실권 회복을 도모하여 막부에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부는 오랜 기간 동안 신뢰관계를 쌓아왔던 직무와 승무 부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방은 1607년 자살미수 사건을 일으킨 후 몇 개월 후 분사(憤死)하였으며, 용조사정가 역시 같은 해 서거하였다. 이에 과도씨는 명실상부 좌하번의 대명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러나 직무가 번주(藩主)에 취임한 일은 없다.

직무는 1610년 은거 후, 1618년 병사하였다. 부친이 창건하고 훗날 과도씨의 보제사(菩提寺)로 기능하게 되는 고전사(高傳寺)에 안장되었다. 가신 12명이 순사하였다.

직무는 귀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상당한 고통을 겪으며 임종을 맞이하였는데, 이로 인해 직무의 죽음을 고방 원령의 소행으로 해석하는 설도 떠돌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고방의 후손이 1630~1640년대에 이르러 용조사씨의 재흥을 도모하다 실패한 역사적 사실도 덧붙여져, 용조사씨에서 과도씨로의 정권교체를 둘러싼 괴담이 성립하였다. 즉, 과도씨에게 원한을 품은 원령과 그 화신인 고양이, 그리고 이를 퇴치하는 충직한 가신을 주요 등장인물로 하는 괴담이 성립하였는데, 이 괴담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연극화하여 ‘과도소동(鍋島騷動)’이라는 장르를 형성하였다.

묘소

좌하현(佐賀縣) 좌하시(佐賀市) 본장정(本庄町) 고전사(高傳寺)

참고문헌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창비, 2013.
  • 기타지마 만지 지음, 김유성·이민웅 옮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94.
  • 이미숙, 「조선사기장 李參平의 피납과정과 활동에 관한 연구」, 『인문과학연구』26,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 東京大学史料編纂所データベース
  • (http://wwwap.hi.u-tokyo.ac.jp/ships/shipscontro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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