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현(砥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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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지평현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지평현(砥平縣)은 고려 때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광주(廣州)에 소속되었다. 1378년(고려 우왕 4)에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1388년(고려 우왕 14)에 폐지되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철장(鐵場)이 설치되고 다시 감무를 두어 겸직하도록 하였다. 조선 건국 후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 춘천부 지평군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08년(순종 1)에 양근과 합쳐 양평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지평현은 고려 우왕과 공양왕 때 두 차례에 걸쳐 감무를 설치하였으며, 조선 개창 후인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현감이 파견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양광도에 속했던 지평은 1394년(태조 3)에 한양으로 천도한 후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658년(효종 9)과 1685년(숙종 11) 두 차례에 걸쳐 양근군에 일시적으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평현에는 종6품의 현감 1명과 종9품의 훈도(訓導)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후기에 모두 폐지시켰다. 조선후기에 발간된『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종6품의 현감 1명을 두었고,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11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임무는 그 실제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지평현은 1658년(효종 9)에 양근군과 통합되었다가 1668년(현종 9)에 복구되었다. 1685년(숙종 11)에 고모(姑母)를 살해한 강상(綱常) 죄인 해옥(亥玉)으로 인해 고을이 폐지되고 양근군에 소속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강등되거나 혁파된 고을이 복구될 때 지평현도 다시 설치되었다(『숙종실록』 15년 1월 2일).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춘천부 지평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08년(순종 1)에 양근과 지평을 합쳐 양평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지평현(砥平縣)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지평(砥平)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