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징무처(指徵無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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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내거나 환곡을 갚을 사람이 도망 혹은 사망하여 받아 낼 길이 없는 상황.

개설

조선시대 부세제도는 전세 및 공물·신역(身役)의 부과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환곡의 이자가 중요한 재원으로 수취되었다. 그중 신역은 사람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세금 부과 대상자인 사람이 죽거나 도망하였을 경우에는 징수할 곳이 사라져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환곡의 분급도 신역과 마찬가지로 징수 대상이 사라질 경우에는 받아 낼 길이 없었다. 환곡은 호 단위나 토지를 대상으로 분급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람에게 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신역과 환곡에서 징수할 대상이 사라졌을 경우 정부에서 탕감(蕩減)을 명하면 문제가 없지만, 탕감해 주지 않으면 지방관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액수를 채워야만 하였다. 결국 세금을 물어야 할 의무나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세금을 거두는 ‘백징(白徵)’이 자행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 신역이나 환곡의 미징수분을 받아 내기 위하여 백징이 빈번히 시행되었는데, 친척에게 징수하는 족징(族徵)과 이웃 사람에게 징수하는 인징(隣徵)이 주류를 이루었다(『영조실록』 9년 12월 19일).

내용 및 특징

신역은 군역(軍役) 부담자와 시노비(寺奴婢)가 도망가거나 사망하였을 때 징수 문제가 발생하였다.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아 신역 담당자가 사망하거나 고향을 떠나 구걸하는 상태에 이르면 이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친척에게 징수하였다. 그러면 친척도 도망가고, 친척이 도망간 뒤에 그 이웃에게 징수하면 이웃도 도망하여 마을이 비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백징이 그 면(面)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파급되었다. 이런 상황을 묘사하면서 열 집에 아홉 집이 비었다는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는 과장된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43년 1월 1일).

흉년이 들었을 당시 신역을 탕감한다 하더라도 다음 해에는 다시 신역을 징수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관은 징수할 곳이 없는 자를 자세히 조사하여 도망자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징수하지 않도록 요청하였다. 이처럼 사람에게 부과된 세금은 대상자가 사라졌을 때에는 세금 징수 대상에서 제외하여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없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인징과 족징을 제한하려고 족징의 대상 범위를 정하였다. 『속대전』에서는 ‘공사(公私)의 부채는 친부자 이외에 형제·일족(一族)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일체 추징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목민심서』에서 족징의 대상을 ‘기공친(期功親)·장인·처남·자형·매부·사위·생질 등’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족징의 운영은 먼 친족까지 시행된 듯하다.

환곡 운영에 있어서 인징·족징은 징수하지 못한 환곡과, 실제로는 걷지 못하였지만 장부상에는 징수한 것으로 기록된 곡식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18세기 후반에 환곡의 규모가 증가함에 따라 분급량이 많아지고 토호·양반·부민(富民) 외에도 환곡 분급에서 빠지는 계층이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환곡 부담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환곡의 징수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징수하지 못한 환곡은 정부가 흉년 등의 이유로 공식적으로 징수 연기를 인정한 것 이외에는 이자의 징수가 연기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환곡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자들은 도망하거나 사망하여 환곡을 받아 낼 길이 없게 되었다. 또한 아전들의 농간으로 발생한 포흠(逋欠) 등도 장부상에만 기록된 환곡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곡이었다. 이것도 징수할 방법이 없는 환곡이었다.

이처럼 환곡 징수가 어려워지자 환곡 납부 대상자가 아닌 친척이나 같은 동리(洞里) 사람에게서 환곡을 대신 징수하였다. 환곡에서의 인징·족징의 범위는 『속대전』 규정보다 확대되어 나타났다. 안정복(安鼎福)이 편찬한 『임관정요(臨官政要)』에서는 ‘환곡을 받은 사람이 도망하여 징수할 수 없을 때에는 동성(同姓) 8촌, 이성(異姓) 6촌에 한하여 징납하고, 만일 친속(親屬)이 없을 때에는 그 마을에서 징납한다.’ 하여 그 범위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징수할 대상이 없어진 환곡의 폐단은 전라도 고창현(高敞縣)의 사례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고창현의 포흠곡은 이미 1779년(정조 3)에 징수할 곳이 없다고 보고되었으며, 1800년에는 2,700여 석, 1802년(순조 2)에는 8,800석의 포흠곡이 보고되었다. 1809년(순조 9)에는 고창현에서 오래전에 징수하지 못하여 축난 곡식 11,030석의 처리 방안으로 5년간 이자를 제하고 원곡만 징수하도록 하고 있다.(하였다.) 그러나 이미 징수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완전 탕감을 하지 않는 이상 계속 포흠곡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러한 잔여곡(殘餘穀)에 다시 이자가 가산되기 때문에 탕감 후 일시 감소한 포흠곡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고창현의 경우에도 징수하지 못한 묵은 환곡인 구환(舊還)을 1802년 일부 탕감하였지만 1805년에는 다시 구환이 4,800석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자가 계속 부과되어 1809년에는 11,030석이나 되었다.

징수할 대상이 사라진 포흠곡은 징수 자체도 문제였지만 이자의 계속적인 증가도 커다란 문제였다. 이 때문에 1809년(순조 9)에는 이자를 제하고 5년간에 걸쳐 분할 징수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1809년은 전국적 기근이 발생하였으며, 당시 전라도는 가장 심한 피해 지역이었다. 그 후로도 몇 년간 전라도에서는 계속 흉년이 들었고 거듭되는 흉년 속에서 고창현의 포흠곡은 계속 징수가 연기되어 정부 차원에서도 징수를 강요할 수 없었다.

그 후 매년 전라도의 재실분등장(災實分等狀)에서는 고창현 포흠곡의 징수 연기 요구가 나타난다.) 이 요구는 1862년(철종 13)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함을 바로잡으려는 삼정이정(三政釐整)의 논의가 있은 이후에야 사라졌다.

이처럼 50여 년간 여러 번 풍년도 들었지만, 미징수 환곡을 해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장기간의 미징수 환곡에 대하여 중앙정부는 사실상 징수를 포기한 상태에 있었고 이는 환곡 총액의 실질적 감소를 초래하였다. 미징수 환곡의 존재는 실제 분급하는 환곡을 감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창고에 남겨 둔 환곡량을 현저히 감소시켰다.

변천

19세기에는 군역·대동·환곡·잡역세 등 각종 조세 외에도, 토지에 근거하여 동전을 수취하는 결렴(結斂)·도결(都結)의 방식이 행해졌다. 환곡 징수가 강화되는 속에서 징수할 곳이 없는 포흠곡의 징수를 위하여 토지에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도결이 시행된 것이었다. 도결의 징수는 환곡의 진휼 기능은 소멸되고, 잡세의 역할이 커지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도결은 철종대인 19세기 중엽에는 거의 전국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도결의 과도한 징수는 1862년 임술민란 발생의 중요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안병욱, 「19세기 부세의 도결화(都結化)와 봉건적 수취 체제의 해체」, 『국사관논총』 7, 1989.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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