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학(地理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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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음양학의 한 분과로서 풍수지리·풍수학의 다른 말.

개설

지리학은 서운관(書雲觀) 또는 관상감(觀象監)의 천문학·지리학·명과학의 세 분과 가운데 하나였다. 지리학은 지형지세의 입지 길흉을 판단하는 분과로서 풍수지리·풍수학과 통용되었다. 지리학은 서운관의 풍수지리 서적, 일반 관료 및 관상감 관원들의 현장 답사, 지형지세 그림, 풍수지리서와 현장이 접목된 종합 학문이었다. 지리학의 업무는 경학에도 밝았던 제조의 감독 아래, 음양학 과시와 취재를 통하여 선발된 실관, 일정 기간 근무 후 능력을 인정받고 임용된 지리학교수와 지리학훈도 등이 담당하였다. 지리학 관원들은 자(子)·오(午)·묘(卯)·유(酉)가 드는 해로 3년마다 시행되던 식년시(式年試)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면 부정기적으로 시행하던 증광시(增廣試)에서 음양과 초시와 복시를 통하여 최종 선발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지리학은 입지의 판단을 통하여 길흉을 예견하던 학문이며, 이와 관련된 임무는 주로 관상감에서 담당하였다. 관상감의 전신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서운관인데, 서운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춘분·추분·하지·동지·입춘·입하·입추·입동에는 반드시 운물(雲物)의 길흉을 기록(書)한다.”에서 유래하였다.

지리학은 세종대 산을 살피는 요령으로 인식되었고(『세종실록』 15년 7월 19일), 경복궁 명당 논의의 준거로 활용되었다(『세종실록』 15년 7월 29일). 또 지리학은 세조대 헌릉 단맥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세조실록』 10년 3월 11일)(『세조실록』 10년 9월 7일).

지리학은 명종대 그 진위 여부가 비판되기도 하였지만(『명종실록』 18년 6월 19일), 여전히 수도 재건과 같은 중차대한 일에서 중심 이론이었다(『선조실록』 26년 6월 13일)(『선조실록』 32년 7월 14일). 또 태봉 자리 선정에도 활용되었다(『선조실록』 35년 6월 25일).

지리학은 광해군대 건원릉 입지 재고에 활용되었고(『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9일), 관상감의 지리학 문헌은 탈취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1년 6월 7일).

지리학은 수원의 입지 판단에도 적용되었고(『현종개수실록』 즉위년 6월 21일), 하관 날짜를 정할 때도 활용되었다(『현종실록』 15년 5월 7일), 순조대에도 왕릉 입지 판단의 중심 이론이었다(『순조실록』 즉위년 7월 10일).

지리학 관원은 입지의 판단·선정·조성에서 현장을 답사하고 삼정승·육조 판서와 함께 지형지세의 그림과 풍수문헌의 내용을 토의하였다. 최종 입지 선정은 지리학 토의를 거쳐 왕이 결정하였다. 그들은 풍수문헌 교정을 담당하였고(『성종실록』 17년 11월 30일), 중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풍수문헌을 검토하였다(『명종실록』 1년 3월 29일). 지리학 관원은 잡과로 선발하였으며, 지리학이나 명과학을 통하여 선발되어 천문학 분과에서 근무하는 자를 양학과자(兩學科者)라 하였다.

변천

태조대 지리학은 주로 풍수학으로 언급되었고, 세종대에는 지리학과 풍수학이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였다(『세종실록』 13년 1월 12일). 세종대에 이양달이 지리학을 포함하여 잡과 출신은 급제한 과목에 정통한 후에 다른 학술 시험을 보도록 건의하여 수용되었다(『세종실록』 3년 3월 15일). 고중안이 지리학의 쇄신을 위하여 풍수문헌들을 간행하고 문사(文士)들이 연구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되었다. 또 예조의 건의에 따라 경기 지역 남향의 좋은 지대는 개인의 사용을 금지하고, 북경에서 지리학 서적들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3년 1월 12일).

지리학은 풍수학에서 이름이 바뀌면서 교수와 훈도 1명씩을 두는 제도가 마련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세조대에는 관상감 제조의 건의로 지리학 생도들에게 관아와 노비가 주어졌다(『세조실록』 12년 2월 28일). 성종대에는 지리와 명과 강습을 많이 한 자에게 체아직이 내려졌다가(『성종실록』 2년 6월 30일), 체아직 두 자리를 다시 지리학에 소속시키고, 생도들을 지리학훈도로 옮겨 소속시켰다(『성종실록』 5년 11월 27일).

정조대에는 지리학교수와 훈도에게 요식(料食)을 받는 두 자리를 배당하였고, 지리학 실관 7명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취재 시험 합격자로 충원하였다(『정조실록』 15년 10월 27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상촌집(象村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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