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보(甑山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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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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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증산보 |
한글표제 | 증산보 |
한자표제 | 甑山堡 |
동의어 | 증산폐보(甑山廢堡) |
관련어 | 단천(端川), 증산(甑山), 진보(鎭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만호 |
장소 | 함경남도 단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증산보(甑山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23년 2월 2일 |
함경남도 단천도호부에 속한 진보.
개설
증산보는 관방시설로, 중종대에 처음으로 종9품인 권관(權管)을 보냈다. 19세기 중반 무렵에는 이미 폐지되어 있었으나, 폐지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위치 및 용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따르면 증산보는 단천의 서쪽 190리(약 74.6㎞)에 위치해 있다. 관아의 서북쪽, 물줄기가 다한 곳에서 야인(野人)과 맞닿아 있다.
변천 및 현황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증산보는 1528년(중종 23)에 권관을 두었다고 한다. 함경남도의 남병사가 권관을 지명하였는데, 1528년(중종 23) 2월에는 병조와 비변사에서 근무의 평가에서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병조에서 직접 증산보의 권관을 파견하기로 했다(『중종실록』 23년 2월 2일).
『여지도서』에 따르면 증산보를 만들고 없앤 시기는 옛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고려 말에 증산(甑山)을 되찾은 뒤에 조선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연달아 야인들에 의한 도둑질이 계속되어 사람을 해치고 가축을 빼앗아 갔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증산보를 설치하고 막아서 지킨 것이다. 『대동지지』가 간행된 19세기 중반에 증산보는 혁파되었는데, 그 시기는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