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광생원(增廣生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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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현의 학교 생도인 생원의 인원을 증원하는 것.

개설

중국 당(唐)태종(太宗)대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지방의 학교 생도인 생원의 수를 증원하였는데, 이를 증광생원(增廣生員)이라고 하였다. 명(明)나라에 와서는 늠선생원(廩膳生員)의 정원이 비면 그 자리에 증원되는 학생을 증광생원이라 하였다.

내용

증광생원을 증광생원시로 이해한 기록이 1534년(중종 29) 12월 7일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보인다. 1447년(세종 29)에 증광생원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아마 세종 즉위 30년이 된 것을 기념한 것으로 보고, 중종 즉위 30년을 큰 경사로 여겨 증광시를 실시할 수 있는지 고례(古例)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증광생원이 증광생원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중종실록』 29년 12월 7일). 그러나 실제로 현전하는 방목을 조사해 보면, 1447년(세종 29)에 식년시·중시·친시는 시행하였으나 증광시는 시행한 적이 없었다.

증광생원에 대한 논의는 이후에도 있었다. 1606년(선조 39)에 선조 재위 40년의 경사에 진하한 전례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는데, 『세종실록』에 경사라 하여 진하한 일은 없고 다만 증광생원한 일은 있었으며, 중종대에 취인(取人)하는데 이 고사를 인용한 일은 있었다고 하였다(『선조실록』 39년 1월 7일). 실제로 1606년(선조 39)에는 증광시를 설행하여 문과에 36명, 생원시에 100명, 진사시에 100명을 뽑았다.

세종대에 언급된 증광생원은 당 태종이 인재 양성을 위해 생원의 수를 증원한 것을 의미하였다. 당 태종이 학교를 잘 다스려 인재를 양성해서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루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0년 8월 21일).

당 태종은 생원을 많이 늘리고 자주 거둥하여 학생들을 격려하고 공직에 임명하기도 하니, 사방의 수재들이 서울로 모여 들어 공부하러 학당에 오르는 자가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5년 8월 22일).

당 태종이 증광생원한 일은 그 후에도 흥학과 인재 양성을 논할 때 실례로 거론되었다(『세조실록』 14년 6월 20일)(『중종실록』 23년 12월 10일).

중국에서 생원은 과거 합격자가 아니라 관학의 생도를 의미하였다(『선조실록』 8년 6월 8일). 명나라 초기에는 각 학교의 학생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는데 얼마 후 정원 외에 마구 증원을 하였다. 선종(宣宗) 연간에 와서 증원하는 수를 정하고 학생들에게 식량을 지급하였는데 이를 늠선생원이라 하였다. 늠선생원의 정원이 비면, 그 자리에 증원되는 학생을 증광생원이라 하였다.

과거와 관련하여 증광생원을 사용한 경우는 증광시로 설행된 생원시를 의미하였다(『정조실록』 7년 4월 11일).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우서(迂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