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부(中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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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중화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중화부(中和府)는 고려시대에 중화현, 중화군이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지역 고을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에 저항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1593년(선조 26)에 중화군을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평양부 중화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갔을 때 적의 수중에 들어간 중화군의 백성들이 왜군에 끝까지 항거하며 저항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1593년에 중화군을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가화압(加火狎), 당악(唐岳)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중화부는 고려시대에 중화현으로 출발할 때 종5품의 현령을 두었다. 1322년(고려 충숙왕 9)에 군으로 승격하였으나 현령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종4품의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66년(세조 12)에 관제 개편에 따라 지군사를 종4품의 군수로 바꾸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수와 훈도(訓導)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훈도를 폐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중화부로 승격하면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당시에는 평안도에 모두 6곳의 도호부가 존재했으나 변방의 국방 강화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속대전』이 편찬될 때는 14곳으로 증대되었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대되었다. 중화도호부사는 평양진관에 소속되어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중화부 소속 관원으로는 중군 1명, 기고관 2명, 교련관 4명, 연대별장 1명, 마병별장 2명, 천총 2명, 파총(把摠) 3명, 초관(哨官) 13명, 파발발장(擺撥撥將) 1명, 중화부 기고관 1명, 병방군관 7명, 좌수 1명, 별감 3명, 도감 10명, 별장 3명, 감관(監官) 3명, 아전 35명, 통인(通引) 34명, 사령 22명, 군뢰(軍牢) 13명, 관노 29명, 관비 45명이 있었다.

변천

중화부는 1136년(고려 인종 14)에 평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던 서경기 4도를 해체하고 강동(江東), 강서(江西), 중화(中和), 순화(順和), 삼등(三登), 삼화(三和)의 6개 현으로 분리할 때 황곡(荒谷), 당악(唐岳), 송곶(松串) 등 9개 마을을 합하여 중화현을 만들고 현령을 두었다. 1322년에 고려 태조왕건의 공신인 김락(金樂), 김철(金哲)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고 현령을 그대로 두었으며, 1371년에 지군사로 승격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66년에 군의 책임자인 지군사를 군수로 바꾸었으며, 1593년(선조 26)에 임진왜란 때 중화군 사람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에 저항하고 충절의 모습을 보인 고을이라 하여 중화부로 승격하였다(『선조실록』 26년 6월 15일).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평양부 중화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