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문(中和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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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중화전의 전문.

개설

궁궐에는 정전 앞에 3개의 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복궁은 정문으로 광화문(光化門), 중문으로 흥례문(興禮門), 전문으로 근정문(勤政門)을 두었다. 창덕궁은 정문으로 돈화문(敦化門), 중문으로 진선문(進善門), 전문으로 인정문(仁政門)을 두었다. 경운궁은 대문으로 대한문(大漢門), 중문으로 조원문(朝元門), 전문으로 중화문(中和門)을 두어 삼문(三門) 체계를 갖추었다.

내용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였던 고종은 인근의 경운궁을 다시 중건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경운궁에 새로운 건물이 많이 생겨났지만, 정전 역할을 담당할 만한 규모의 건물은 마련하지 못했다. 임시 정전의 역할을 담당한 건물은 즉조당(卽阼堂)이었다. 이 건물의 명칭을 태극전(太極殿)으로 변경하고 이곳에서 대한제국 선포 및 황제 즉위를 했다. 1898년(광무 2)에는 태극전이라는 전호를 중화전(中和殿)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경운궁에 정전으로 사용할 만한 건물을 마련하지 못했다. 드디어 1901년(광무 5)에 중화전 전면 마당을 터로 삼아 새로운 법전을 세우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새로운 법전은 중층의 거대한 건물로 황제국에 걸맞은 규모였다. 중화문은 새로운 법전의 전면에 위치한 전문(殿門)으로 중화전 및 주변 행각과 같이 만들어졌다. 중화문은 1901년 7월 17일에 입주(立柱)했고, 8월 12일에 상량했으며, 9월 18일에 현판을 걸었다(『고종실록』 39년 8월 9일).

중층의 거대한 중화전을 건립하다 보니 중화전을 감싸는 행각의 규모 역시 커져야만 했다. 하지만 기존의 경운궁 터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경운궁 남쪽 궁장을 훨씬 남쪽으로 옮겨 경운궁 터를 넓혀서 중화문과 행각을 건립해야 했다. 하지만 경운궁 남쪽 궁장 바깥쪽 길은 주변에 위치한 각국 공사관들의 출입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여러 공사관과 협의를 진행해야 했다. 그 결과 여러 공사관들이 이전해 가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독일공사관 터를 매입하고 이곳에 의정부(議政府)를 세웠다.

중화문을 새롭게 만들면서 기존의 경운궁이 크게 바뀌었다. 원래 경운궁 궁장 남쪽 중앙에 정문으로 인화문(仁化門)을 두었고, 동문으로 대안문(大安門)을 두었다. 하지만 중화문의 건립으로 인화문을 철거했고, 대신 중문으로 조원문을 만들었다. 조원문을 만들면서 대안문, 조원문, 중화문으로 이어지는 궁궐의 삼문 체계를 완성했다. 궁궐 내부에 흘렀던 금천과 금천교 역시 바뀌었다. 금천은 모두 은구(隱溝)로 가려 노출되지 않게 만들었다. 인화문 안쪽에 있던 금천교는 대안문 안쪽으로 옮겼다.

1904년(광무 8)에 경운궁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함녕전(咸寧殿)에서 시작한 불길은 서쪽으로 번져 경운궁의 주요 전각을 모두 태웠다. 중화문 역시 이 화재로 소실됐다. 곧 바로 경운궁에 대한 재건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전각은 화재로 소실된 건물과 유사하게 다시 복원하였다. 하지만 중층의 중화전은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복원했다. 또 중화문은 기존의 자리보다 4칸 정도 남쪽으로 옮겨지었다. 그 결과 중화전 마당은 기존보다 훨씬 넓게 만들어졌다. 중화문은 1905년(광무 9) 3월 18일에 정초했다.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