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빈만차랑(中濱萬次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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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막부말기와 명치초기에 활동한 일본인 통번역관이자 교육자.

개설

중빈만차랑은 토좌(土佐: 현 고지현)번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병약한 모친과 형을 대신해서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였다. 1841년에 만차랑은 14세의 나이로 고기잡이를 떠났다가 조난을 당하였는데, 미국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호 의해서 구출되었다.

선원의 도움으로 미국에 도착한 만차랑은 영어를 비롯해서 수학·측량·항해술·조선술 등을 배웠으며, 캘리포니아에서 금광 채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만차랑은 10여 년 남짓 미국 생활을 하면서 번 돈으로 선박을 구입하여, 하와이를 거쳐서 1851년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던 막부의 심문을 받은 후에야 만차랑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853년에 미국의 페리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출현하자, 막부에서는 만차랑을 초빙하여 관직을 제수하고, 중빈(中浜: 현 나카하마)이라는 성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인해서 페리제독 일행의 통역 업무를 맡지 못하였다. 1860년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한 견미사절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서 미국을 다녀왔다.

이후 도사번에서 영어와 항해술 등을 가르쳤으며, 1867년에는 살마번의 초청을 받고 녹아도(鹿兒島: 현 가고시마)에 가서 영어와 항해술을 가르쳤다. 명치유신 직후인 1869년에는 동경대학의 전신인 개성학교(開成學校)의 영어 교수로 임명되어서, 평생을 교육자로 생을 마감하였다.

활동 사항

1867년 3월에 조선 정부는 팔호순숙(八戶順叔)이라는 일본인이 중국 신문에 투고한 내용을 입수하였다. 그 내용은 막부 장군 중빈만차랑이 상해에서 화륜선 80척을 만들어서 귀국하였으며, 막부 내부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풍문을 담고 있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서 그 풍문의 사실 여부를 밝힐 것을 일본 측에 요구하였다(『고종실록』 4년 3월 7일). 번주 종의달(宗義達)은 막부에 서신을 보내서, 조선 정부가 파악한 정한론의 진위 여부를 판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막부의 판창승정(板倉勝靜)은 팔호순숙의 정한론을 해명하기 위해서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겠다는 뜻을 대마도에 전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영미대화첩경(英米對話捷徑)』, 知彼堂, 1859.

묘소

일본 동경의 조시가야 묘원[雜司ヶ谷靈園].

참고문헌

  • 근대한국외교문서 편찬위원회편, 『근대한국외교문서』, 동북아역사재단, 2012.
  • 宮永孝, 『ジョン・マンと呼ばれた男—漂流民中浜万次郞の生涯』, 集英社, 1994.
  • 石井硏堂, 『中浜万次郞』, 博文館, 1900.
  • 有明夏夫, 『誇るべき物語—小説・ジョン万次郞』, 小學館, 1993.
  • 井伏鱒二, 『さざなみ軍記・ジョン万次郎漂流記』, 新潮文庫, 1986.
  • 中濱東一郎編, 『中濱萬次郞傳』, 冨山房、1936.
  • 中浜明, 『中浜万次郞の生涯』, 冨山房, 1970.
  • 中濱武彦, 『ファースト・ジャパニーズ ジョン万次郞』, 講談社, 2007. 中浜博, 『中浜万次郞—「アメリカ」を初めて伝えた日本人』, 冨山房インターナショナル,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