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박계(中朴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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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와 꿀을 반죽하여 직사각형으로 자른 후 기름에 지진 유밀과.

개설

밀가루에 꿀을 넣고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직사각형으로 자른 후 뜨거운 기름에 지진 한과(漢菓)로 유밀과(油密果)의 일종인 박계류(朴桂類)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연희와 제사에 많이 쓰였다.

만드는 법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는 밀가루 1말에 꿀 1되, 기름 1홉, 끓인 물 7홉을 합하여 미지근하게 하여 만들라고 하였다. 『주방문(酒方文)』에는 꿀 2되에 물 1되를 타서 많이 끓인 후 식으면 밀가루 1말에 넣어 만든다고 하였다. 두 문헌에 기록된 재료가 밀가루 1말 기준이나 꿀과 물의 양이 다르다. 하지만 반죽하는 물의 온도는 익반죽도 냉반죽도 아닌 미지근한 물을 이용하였다.

크기에 대하여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밀가루에 꿀물을 타서 반죽을 하는데, 약과 반죽보다 조금 질게 하여 도마에 놓고, 너비는 9푼(약 3㎝), 길이는 2치 3푼(약 7.6㎝), 두께는 4푼(약 1.3㎝)으로 잘라 지지되 거죽이 누렇게 되도록 지져서 건진다.”고 하였다.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은 5푼 두께로 밀어서 1치 길이, 8푼 넓이로 베어서 지져서 건지는데 겉만 노랗게 익힌다고 하였다. 즉 속까지 채 익지 않은 상태였다. 두께가 두꺼워 지지는 과정에서 속까지 완전히 익히기 어려워서 제사상에 괴었다가 먹을 때 다시 석쇠에 굽거나 익혀서 먹기도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중박계(中朴桂)와 약과(藥果)의 차이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중박계는 반죽에 기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약과와 다르며, 지지는 기름이 적게 든다. 그래서 중박계는 기름을 빌려 지지고 갚는다 하였다고 할 정도라는 속설이 있다. 즉 약과와 같은 유밀과이나, 반죽에 참기름이 들어가지 않아 과자에 켜가 없고, 지지는 기름의 양이 적게 들고, 지진 후 꿀로 만든 즙청에 담구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주로 밀가루가 이용되었지만, 찰기장가루나 보릿가루를 눅게 반죽하여 구멍떡을 만든 후 유기에 담고 보자기를 덮어 따스한 방에 놓아 하룻밤 재웠다가 참기름에 전병같이 지져서 쓰기도 하였다.

연원 및 용도

중박계는 조선시대에 궁중과 일반 사대부가에서 잔치나 제사에 주로 사용하였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의 마지막 부분에 밀병(蜜餠)은 약과·대계(大桂)·중박계·홍산자·백산자·빙과(氷果)·과과(瓜果)·봉접과(蜂蝶果)·만두과(饅頭果) 등으로 이는 모두 제사나 손님 접대에 사용한다고 하였다.

중박계는 여러 산릉(山陵)과 진전(眞殿)의 대소 제품(祭品) 중 하나로 산릉의 사시대향(四時大享)과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冬至)·납향(臘享)의 여섯 별제(別祭) 제탁(祭卓)의 첫째 줄에 차렸다(『세종실록』 29년 11월 2일). 그 크기에 따라 대박계, 중박계, 소박계가 있는데, 주로 중박계와 소박계를 이용하였다. 제향에서는 중박계를 여러 그릇에 담아 올리기도 하고, 5~9촌(15~27㎝)까지 높이 괴어서 고배상(高杯床)을 차렸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만물문(萬物門)」에서 “지금 우리나라 예전(禮典)에 약과와 중박계·소박계 등이 있는데, 이를 전혀 제사에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듯하다. 이 유밀과는 대갱(大羹)이나 현주(玄酒)처럼 깨끗한 뜻이 없고, 또 가난한 집으로서는 장만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진실로 그럴 듯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중박계를 혼례 때 반드시 쓰기 때문에 신부가 시집[舅家]에 음식을 만들어 보내는 것을 박계(朴桂)한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도문대작(屠門大嚼)』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시의전서(是議全書)』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 『주방문(酒方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