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重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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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9월 9일로 날짜와 달의 숫자가 겹치는 민속 명절.

개설

중구(重九)는 음양철학적인 중일(重日) 명절의 하나로, 음력 3월 3일 삼짇날과 5월 5일 단오 등도 양수(陽數)가 겹친 날이지만 특히 9월 9일을 일컫는 말이다. 중양(重陽)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국화를 따다가 떡을 해 먹는데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 떡과 같은 화전(花煎)이다.

상촌(象村)신흠(申欽)의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야언(野言)」에 사람이 사는 동안 한식과 중구만은 삼가서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사시(四時)의 변화 가운데 이 절기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국화를 감상하는 상국(賞菊), 장수에 좋다는 국화주를 마시거나 혹은 술잔에 국화를 띄우는 범국(泛菊) 또는 황화범주(黃花泛酒),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시주(詩酒)의 행사도 중구일에 가졌다.

연원 및 변천

중구에는 등고(登高), 즉 높은 곳을 올라가는 풍속이 있다. 옛날부터 이날이 되면 사람들은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담아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셔 재액을 없앴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머니에 수유를 담는 내력은 비장방(費長房) 고사(故事)에서 나온 것이다. 동한(東漢) 때 사람 환경(桓景)이 일찍이 앞날을 잘 맞춘다는 선인(仙人) 비장방을 찾아가 배웠다. 하루는 비장방이 환경에게 이르기를, “앞으로 9월 9일에 너의 집에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니, 급히 가서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붉은 주머니에 수유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국화주를 마시게 하면 재앙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환경이 그의 말을 따라 중구일에 온 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저물 때 내려와 보니, 닭·개·소·양 등의 가축이 일시에 다 죽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중양절은 한나라 이래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당송대에는 추석보다 더 큰 명절로 지켜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군신들의 연례 모임이 이날 행해졌다.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열전」신라 조항에 신라는 나라 풍속에 중구일에는 서로 경하하며, 해마다 이 달에는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에게 절을 하였고,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 비단과 구슬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때 중양연(重陽宴)을 열었다는 기사가 많다. 특히 1190년(고려 명종 20)에는 중양에 왕이 경령전(景靈殿)에서 친히 제향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날은 국가가 규례를 정하여 내외 신하들과 송나라·탐라·흑수(黑水) 등의 외객들까지 축하연에 초대하였다고 한다.

조선초기 세종 때는 중삼(重三), 즉 3월 3일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고 노인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을 추석에서 중구로 옮기는 등 이날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1460년(세조 6) 9월 9일에 왕이 모화관(慕華館)에서 기로(耆老)들에게 중구연(重九宴)을 베풀었다(『세조실록』 6년 9월 9일). 성종 때는 이날 경연의 당상관·홍문관·승정원과 대궐에 입직한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하사하였다. 또한 2품 이상으로 나이 70이 된 사람은 모두 나오도록 허락하였으며, 도승지에게 명하여 선온(宣醞)하게 하고 매년 중구일을 잔칫날로 삼았다.

선조 때 예조에서 제향 절차에 대해 아뢰면서 중양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속절(俗節)로 열거되어 있지 않지만 이날 시식(時食)으로써 천신(薦新)하는 것이 고례(古禮)이므로 속절에 해당하는 제사가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중구에는 사대부의 중양회(重陽會), 또는 등고하는 모임이 있었다. 서울 풍속에 이 날 남산과 북악산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는데, 중구일 등고의 옛 풍습을 따른 것이다. 이날은 범국회(泛菊會)라는 모임도 있었다. 지방마다 벌어지는 각종 시회(詩會)와 계회(契會)도 주로 이때 개최되었다.

이언적(李彦迪)은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정조·한식·단오·중추 및 중양을 속절로 여겨 아침 일찍 사당에 들러 천식(薦食)하고 이어 묘 앞에서 전배(奠拜)한다고 하였다.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를 보면 조선중기까지 사가(私家)에서는 삼짇날의 답청(踏靑)처럼 중구절은 등고 외에 간혹 간단한 천주과지례(薦酒果之禮), 즉 천신례(薦新禮)가 있을 뿐 묘제를 행하는 한식에 비하면 속절로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와 삼짇날과 중구일이 함께 또는 둘 중의 하나가 원래 중월(仲月)에 복일(卜日)하여 행하던 사시제(四時祭)의 한 축으로 설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조선전기까지는 시제보다 기제(忌祭)를 중요하게 여기다가 조선중기에 이르러 사대부들이 시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일 년 4회의 시제가 부담되었으므로 이를 춘추 2회로 줄여 봄에는 삼짇날에, 가을에는 중양절에 지내는 자가 많아졌다고 하였다.

중양절의 시제는 조선후기 이후 특히 영남 지방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모신 집안들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다. 부조가 인정된 조상에 대한 시제는 각별히 중일을 택하여 삼월 삼짇날이나 구월 중구절에 제사를 지내는데, 특히 중구 때가 되어야 햇곡을 마련할 수 있었으므로 첫 수확물을 조상에게 드린다는 의미도 갖는다.

중구절에는 이와 같이 제사·성묘·등고 또는 각종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관리들에게 하루의 휴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였지만 또한 명절이었으므로 이날은 형 집행을 금하는 금형(禁刑)의 날이기도 하였다.

중구일의 제사 음식과 황국술 및 대추 음식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시문이 여럿 있다. 이호민(李好閔)의 『오봉집(五峯集)』에는 국화술이 백 가지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는 내용의 시문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중구일에 있었던 음주풍속과 민속신앙을 엿볼 수 있다.

가을에는 국화 화채를 즐긴다. 국화꽃에 꿀물을 타 만드는데, 녹말을 섞기도 한다. 술에 국화를 넣은 국화주도 담는다. 국화주는 꽃을 따서 술 한 말에 꽃 두 되 꼴로 베주머니에 넣어 술독에 담아 뚜껑을 덮어 둔다. 약주에 국화꽃을 띄워 국화주를 즐길 수도 있다. 화전·화채·술 등에 모두 쓰이는 국화는 재래종인 감국(甘鞠)이어야 향기도 좋고 오랫동안 싱싱하다. 국화전은 노란 국화 꽃잎을 따서 국화 찹쌀떡을 만드는데, 그 방법은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 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으며, 이름도 화전이라고 한다. 봄의 진달래 화전은 율무를 많이 쓰는 반면 가을의 국화전은 찹쌀가루를 많이 쓴다.

중구절의 국화술은 중국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과 관련이 깊다. 그가 이날 국화꽃밭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데 흰옷을 정갈하게 입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연명의 친구가 보낸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연명은 국화꽃과 함께 온종일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 목은(牧隱)이색(李穡)도 중양절에 술을 마시며 도연명의 운치를 깨닫는 시를 남겼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과거에는 각 마을마다, 또는 2~3개 마을에 하나씩 동네 단골무당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연말에 이장에게 이세(里稅)를 내듯이 중양절이 되면 이들에게 시주를 하는 관례도 있었다. 농촌에서는 간혹 추석 때 햇곡식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한 집에서 뒤늦게 이때 조상에 대한 천신 제사를 올렸다. 전라남도 고흥의 한 지역에서는 이때 시제(時祭)를 지내는데, 이를 ‘귈제’라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묵재일기(黙齋日記)』
  • 『봉선잡의(奉先雜儀)』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오봉집(五峯集)』
  • 고점상 주편, 『중국민족 절일대전(節日大全)』, 지식출판사, 1993.
  • 장주근, 『한국의 세시풍속』, 형설출판사, 1984.
  • 최남선, 『조선상식』, 국문사, 1953.
  • 정승모, 「세시관련 기록들을 통해 본 조선시기 세시풍속의 변화」, 『역사민속학』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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