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천사(濬川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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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도성 안 개천의 준설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1760년(영조 36) 2월 개천(開川: 현 청계천) 준천 후 준천사를 설치하였다. 관서는 중부(中部) 장통방(長通坊)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760년 개천의 준설을 마친 뒤 준천의 효과를 지속하고 또다시 오물 등으로 수로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며 관리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이를 위한 별도 기구의 창설이 요구되었다. 그 결과 준천사가 설치되었으며, 준천사는 이후 개천의 준설 이외에도 서울의 사산(四山) 즉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산의 나무 보호를 담당하였다.

1760년 준천 때에는 약 2개월 동안 방민(坊民) 15만 명과 고용한 장정[丁夫] 5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3만 5000여 민(緡)에 해당하는 돈과 쌀 2,300여 곡(斛) 등도 동원되었다. 처음 개천의 좌우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이 튼튼하지 못하다고 하여 1773년 돌담으로 바꾸었다. 송기교(松杞橋)부터 장통교(長通橋)까지는 훈련도감이, 장통교부터 태평교(太平橋)까지는 금위영이, 태평교부터 영도교(永渡橋)까지는 어영청이 담당하여 개천 좌우의 석제(石堤)와 석교(石橋)를 보수하였다.

한편 1760년 준천 후 쓰고 남은 돈 3만 냥은 진휼청으로 넘겨주었다. 진휼청에서는 이 돈으로 해서(海西)·관서(關西) 지역의 곡물을 무역하여 1년 동안 모곡(耗糓)을 취하여 2,400여 냥의 돈을 더 만들었다[作錢]. 여기에 평산둔세(平山屯稅) 50냥을 더하여 이후 준천하는 밑천으로 만들었다. 이후 대체로 2, 3년에 한 번씩 준천을 하였으나 소소하게 행해지다가 1832년(순조 32) 약 7만 5천여 냥을 들여 대규모로 준천한 바 있다.

조직 및 역할

준천사는 도제조가 3명인데 정1품이며 현임 의정이 겸임하였고, 제조는 6명으로 종2품 이상으로 병조 판서·한성판윤·훈련대장·금위대장·어영대장이 겸임하되 그중 1인은 비변사(備邊司)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도청(都廳)은 1명이고 정3품 당상관으로서 어영청의 천총(千摠)이 겸임하였다가 정조대에 훈련도감·금위영 또는 어영청의 별장(別將)·천총 중에서 겸임하도록 하였다. 낭청은 3명으로 정7품이고, 동(東)·서(西)·남(南)의 삼도참군(三道參軍)이 겸임하였다. 서리는 5명으로 삼군문과 병조, 한성부 서리가 겸임하였는데, 고종대에 8명으로 증원하였다.

변천

1790년(정조 14) 창립된 주교사가 준천사에 부속되면서 호남과 호서 지방의 조운, 한강의 부교(浮橋) 조성 등을 관장하는 사무까지 겸하게 되었다.

한편 동반아문(東班衙門)이었던 준천사는 고종 초년에 비변사가 의정부에 합속되면서 1865년(고종 2) 무관(武官)으로 옮겨졌다. 1894년 군국기무처가 의안(議案)을 올려 준천사의 여러 사무가 한성부로 넘어갔고, 이에 따라 준천사는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