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군(駐箚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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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정부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하였던 군대의 조직 명칭.

개설

주차군은 한국주차군을 말한다. 1904년 4월 3일 일본 정부는 러일전쟁의 확전을 계기로 대한제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주차군으로 개편하였으며 한국주차군으로 명명하였다. 특히 일본 정부는 1904년 2월 23일 강압적으로 조인한 한일의정서 3조와 4조에 따라 대한제국 내 주요 군사거점들을 임의로 사용할 권리를 획득하였으므로 일본군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다. 당시 대한제국은 국내외에 일본의 침략성을 알리며 전시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의정서를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조선을 병탄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진출하였던 일본군은 1880년(고종 17) 12월 공사관 개설 시 6명의 일본군을 파견한 이후 지속적으로 병력의 수를 증가시켰다. 1883년에 제물포조약을 근거로 2개 중대의 공사관 수비대를 확충하고, 1885년에는 한성조약에 따라 1개 대대를 주둔시켰다. 나아가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육군과 해군의 전투부대를 위시하여 각종 병참대 및 경비대를 파견하였다. 이후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을 1896년(고종 33)에는 한국주차대, 1904년(광무 8)에는 한국주차군 등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896년 일본 외무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K. I. Weber] 사이의 각서에 따라 일본군 4개 중대 규모의 한국주차대가 창설되었다. 한국주차대는 서울에 2개 중대, 부산과 원산에 1개 중대를 주둔시켰다. 1903년 12월에는 한국주차대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주차대사령관은 대한제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최고 책임자였다. 따라서 주차군은 일본 제국정부의 정책 향방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반도 내 반대 세력을 일소하려고 기존 대한제국 주재 군대 조직을 확장한 것이었다.

조직 및 역할

한국주차군의 설립 초기 병력의 규모는 1개 연대, 4개 대대, 2개 중대 등의 총 4,273명이었다. 주차군의 조직은 한국주차군사령부, 한국주차군수비대, 한국주차헌병대 등이며 이 외에 사령부 예하부대들이 있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한국인의 반일운동 탄압과 대륙 침략부대의 후방 지원이었다. 주차군사령부는 일본 대본영 직속으로 1904년 3월 20일 동경에서 편성된 후 4월 3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사령부는 막료, 참모부, 부관부(副官部), 경리부, 군의부(軍醫部)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대 사령관은 소장 하라구치켄사이[原口兼濟]였다. 1904년 10월에는 조선총독을 지낸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찌[長谷川好道]가 부임하였다. 1906년 7월에는 한국주차군사령부조례가 공표되어 군참모부, 군부관부(軍副官部), 군법관부, 군군의부(軍軍醫部), 군수의부 등의 6부 체제로 정비되었고, 10월에는 우편부가 증설되었다. 주차군의 주요 정책은 주차사령관, 전권공사, 병참총감의 협의하에 결정되었고 최종적으로 대본영의 결제를 얻어 시행되었다. 그런데 1905년 통감부가 창설된 이후에는 주차군이 일본 천황의 직속이 되었다. 이것은 전시체제에서 평시체제로 주차군의 임무를 전환한 것이며, 통감에게 주차군의 병력 사용권을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사청의 이사관은 주차군의 병력 동원 요구권을 지닐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문관 통감이 군대를 조종한다고 하여 일본 군부의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주차군의 작전 변경 등에 대한 계획은 참모총장을 경유하여 천황의 결재를 받아 시행되었다.

변천

한국주차군은 1906년 7월 31일에 천황의 칙령 205호인 한국주차군사령부조례에 따라 재정비된다. 당시 변경된 내용을 보면, 첫째 군사령관은 군정과 인사는 육군대신, 작전 및 동원계획은 참모총장, 교육은 교육총감에게 처분받도록 하여 일본 내 기관과 유기적 연계 속에 운영하도록 하였다. 둘째 군사령관의 병력 이동 시 통감의 허락을 받도록 하여 통감의 권한을 크게 확대하였다. 주차군 병력은 1905년 일본에서 새로 신설한 13사단과 15사단을 주축으로 한 2개 사단 체제를 기준으로 했다. 1개 사단은 9,199명으로 2개 여단, 기병대대, 포병연대, 공병대대, 치중병대대로 구성되었다. 주차군의 2개 사단은 당시 일본군 총병력의 11.7%를 차지한 것이다. 또한 주차군의 예산은 400만 엔으로 통감부 예산이 140만 엔이었음을 고려할 때 대한제국 내 의병 탄압 등 한반도 침략을 위해 진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의병 탄압에 성공한 다음에는 1개 사단 체제로 변경한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이후에는 조선주차군으로 변경되었고, 1915년 이후로는 19사단과 20사단을 창설하여 2개 사단 체제를 갖추었고 1918년부터는 조선군으로 개칭하였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김상기, 「‘제14연대 진중일지’를 통해 본 일본군의 의병탄압」, 『한국독립운동사연구』4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 유한철, 「日帝 韓國駐箚軍의 韓國 侵略過程과 組織」, 『한국독립운동사연구』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4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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