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번(朱之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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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관료.

개설

주지번은 1595년에 장원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 등을 거쳐 이부(吏部) 우시랑(右侍郎)에 임명되고, 사후에는 예부(禮部) 상서(尙書)로 추증되었다. 특히, 그는 조선 사행(使行)의 업무를 잘 마치는 등 외교관으로 업적을 남겼다. 주지번은 서화(書畵)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조선의 성균관(成均館) 명륜당(明倫堂) 등 여러 곳에 글씨를 남겼고, 그의 그림은 조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활동 사항

주지번은 명나라 산동(山東) 사평(茌平)에서 태어나 1595년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 우춘방우유덕(右春坊右諭德), 우춘방우서자(右春坊右庶子), 소첨사(少詹士), 예부(禮部) 우시랑(右侍郞), 이부(吏部) 우시랑(右侍郎) 등을 거쳐 사후에 예부(禮部) 상서(尙書)로 추증되었다. 주지번은 당시 명에서 학사의 문장 세 사람을 꼽을 때, 초굉(焦竑)·황휘(黃輝) 등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선조실록』 39년 1월 23일).

만력제(萬曆帝)는 1605년 11월에 황태자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한림원수찬주지번을 정사(正使)로, 예과좌급사(禮科左給事)양유년(梁有年)을 부사(副使)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지번 등은 1606년 4월 11일에 한양에 도착하여 황제의 조서(詔書)와 칙유(勅諭)를 전달하였다(『선조실록』 39년 4월 11일)(『선조수정실록』 39년 4월 1일). 주지번은 당시까지 조선에 온 사신들과 달리 뇌물 등을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청렴하였다고 한다.

주지번은 조선에 다녀온 후,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를 저술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의 사행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 의하면, 1605년 12월 15일에 정사로 임명되어, 다음 해 2월 16일에 북경을 출발, 4월 10일에 한양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4월 20일에 출발해서 5월 2일에 압록강을 건너갔다. 주지번은 조선에 머물며 성균관 사예(司藝) 이지완, 성균관 직강(直講) 허균 등과 시와 글씨를 주고받으며 문화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주지번은 성균관 명륜관 앞에 있는 현판과 전주 객사(客舍)에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글씨를 썼다. 이것은 태조이성계의 출생지에 경영된 객사라 해서 중국한(漢) 고조(高祖) 고사에서 딴 것이다. 즉, 전주가 조선 왕조의 발상지임을 나타낸다.

주지번은 역대 중국 명가들의 시문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원문을 필사하여 첩 형식으로 꾸민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을 선조와 원접사(遠接使)유근(柳根)에게 주었다. 이것은 조선 화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허난설헌의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을 읽고 감탄하여 중국의 문단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주지번은 한중 문화교류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인물이다.

저술 및 작품

저서: 『사조선고(使朝鮮稿)』·『남환기성(南還紀胜)』·『난우시문집(蘭嵎詩文集)』 등

작품: 『강남춘사책(江南春詞冊)』·『화훼(花卉)』·『계산원조(溪山遠眺)』 등의 서화. 성균관 명륜당 건물의 현판, 전주 객사(客舍) 현판 등.

상훈 및 추모

주지번은 사후에 예부 상서로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명실록(明實錄)』
  • 『명사(明史)』
  • 『명인소전(明人小傳)』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성호사설(星湖僿說)』
  • 강양, 『朝鮮前期 朝明 使行外交와 交通路: ‘조선 사행록'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 김한규 옮김, 『사조선록 역주』 4, 소명출판, 2012.
  • 김홍대, 「朱之蕃의 丙午使行(1606)과 그의 서화 연구」, 『온지논총』 11, 2004.
  • 노경희, 「17세기 초 문관출신 明使 接伴과 韓中 문학교류」, 『한국한문학연구』 42, 2008.
  • 신영주, 「朱之蕃의 조선 사행과 문예교류에 관한 일고」, 『한문학보』 16,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