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화인(周字火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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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관용 말을 민간에 상으로 주었거나 민간인과 바꾼 말을 관마와 구별하기 위하여 찍은 ‘주(周)’자 낙인.

개설

조선시대에는 마필을 비롯해 호패, 군기 물자, 선박 및 각종 부신(符信) 등에 소속이나 인적 사항이 표시된 낙인을 찍었다. 특히 마필의 경우에는 소유주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낙인을 찍었는데, 관청에 속한 말인 관마(官馬)에는 ‘산(山)’자를 찍어 매매 방지의 증거로 삼았다. 그런데 간혹 관용 말을 일반 백성에게 상으로 내리거나 관마를 민간의 말과 맞바꾸어 관마와 민간의 말이 종종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이에 1407년(세종 16) 별도의 주자화인(周字火印)을 만들어 일반 백성들이 소유한 말에 ‘주(周)’자 화인을 다시 찍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낙인이 사용됐는데, 낙인은 특히 마정(馬政)과 관계가 깊었다. 목장마나 교역마를 점고(點考)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마필의 낙인 유무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조선초기에는 동북면과 서북면에서 여진족에게 우마를 방매(放賣)하는 일이 잦았는데, 1407년(태종 7)에는 무분별한 방매를 막기 위해 단련사(團練使)로 하여금 민간인들이 소유한 마필을 점고해 낙인을 찍고 이를 장부에 기록하게 하였다. 또 제주마의 거세를 방지하기 위해 낙인을 찍기도 했으며, 제주 상인들이 제주마를 구입하여 육지 등에 판매할 때는 ‘시(市)’자 낙인을 찍어 강도나 도적들이 판매하는 마필과 구별되도록 하였다. 각 목장의 망아지를 사육하도록 백성들에게 분양할 때도, 감사나 점마별감(點馬別監)으로 하여금 낙인을 찍어 관리하게 하였다. 그밖에 사복시 관할인 살곶이목장에서 도망한 말을 추적하기 위해 ‘양마(養馬)’라는 낙인을 찍은 목패(木牌)를 발급하기도 했으며, 한성부에서는 우마를 훔치거나 함부로 도살하는 것을 막고 시장에 팔기 위한 교역 허가의 증표로 삼기 위해 낙인을 찍었다.

관용으로 쓰이는 말에는 ‘산(山)’자를 낙인찍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산(山)자가 찍힌 말을 민간에 상으로 내리거나 관용 말을 일반민의 말과 바꾸는 경우에는 관마와 일반 말이 혼동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1424년(세종 16년) 조정에서는 이같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별도로 주자낙인(周字火印)을 만들어 일반인에게 준 관용 말의 ‘산(山)’자 낙인 위에 ‘주(周)’자를 찍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때 서울에서는 사복시로 하여금 주자화인을 찍게 하였고, 지방에는 점마별감을 보내 각 감영의 도회소에서 낙인을 찍게 하였다. 또한 강원도에는 점마별감을 보내지 않고, 강원도의 수령관으로 하여금 낙인을 찍게 하였다. 한편 이듬해인 1435년 1월 1일 이후 ‘주’자를 찍지 아니한 말은 사복시에서 감찰하여 주자화인이 없는 ‘산(山)’자 말을 모두 속공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3일).

참고문헌

  •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 방상현, 『朝鮮初期 水軍制度』, 민족문화사, 1991.
  • 서울대학교 규장각, 『寶印符信總數』, 민창문화사, 1994.
  • 방상현, 「朝鮮前期 水軍 軍役考」, 『慶熙史學』11, 1983.
  • 손혁, 「號牌와 五家作統에 대하여」, 『慶州文化』9, 2003.
  • 윤훈표, 「조선초기 發兵符制의 실시」, 『학림』31, 2010.
  • 최석운, 「世祖時의 號牌法 施行」, 『향토서울』28,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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