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가례(朱子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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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송대의 주희(朱熹)가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법에 관해 편찬한 책.

개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남송대 사람인 주자가 쓴 책으로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인(後人)의 의탁(依托)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에 전해진 것은 고려 말 주자학과 함께 전래되었다. 그 뒤 명(明)나라 성화(成化)연간에 구준(丘濬)이 위의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여기에 의절고증(儀節考證)ㆍ잡록(雜錄)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을 만들었다.

서지 사항

4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3.8cm, 가로 15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로서의 이 『주자가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확립되면서, 그 준행(遵行)이 강요되어, 처음에는 왕가와 조정 중신에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으로, 다시 일반서민에까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루어진 이 가례가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아, 많은 예송(禮訟)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주자학과 함께 조선이 세계문물에 뒤지는 낙후성(落後性)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예학(禮學)과 예학파의 대두는 예와 효(孝)를 숭상하는 한국의 가족제도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측면도 있다.

『주자가례』에서 ‘가례’의 원리는 천체의 일주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고도 한다. 즉 관자의 자리에서 장자(長子)와 중자(衆子)를 구별하여, 정한 위치와 주인ㆍ주부의 동계(東階)와 서계(西階)에서 동서방향으로 서로 마주하는 원리 같은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북극성은 우주방위 및 사방위의 중심이 되어 천자, 군자, 왕, 종가에서 조상신의 방위는 북쪽에서 남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천의례이든, 관혼상제이든지간에 모든 의례에는 하늘과 인간의 합일을 지향하는 뜻이 있다. 따라서 예의 근원에 하늘이 있고, 하늘을 본받은 뜻이 의례의 방위관과 질서의식에 내재되어 있음을 주자가례에서 밝혔다고 본다. 그러므로 『주자가례』의 연구는 고전 의례연구에 더하여, 천문현상으로서의 천연(天然)의 질서의식을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은 예학연구의 실증적 방법이며 학제 간 연구에 해당된다고 본다.

그 결과로서 『가례』의 의례의식에도 유교의 천인합일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가례』의 의식 절차와 행위 양식에 있어서는 방위에 내재된 질서의식을 통해 나누어지고, 모이고 나열되는데, 이 부분은 주로 천체의 일주운행으로 실증할 수 있다. 이러한 운행질서에 따른 의식의 방위배열은 각 편의 의식을 특징적으로 분류한 기준이 된다. 그리하여 『가례』에서 의식의 형식인 방위를 방(方)과 위(位)의 결합으로 그 뜻을 구분하였고, 이를 천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결합시킨 용어로 본다. 따라서 『주자가례』는 종법의 의례의식이면서, 천문현상으로 밝혀진 방위관념에 따라, 천연의 질서를 본 딴 질서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주자가례에 드러난 위계질서는 천문현상이라는 천연의 질서가 내재된 본체 위에 종법의 옷을 입은 인문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사회의 유교화 중심에는 『주자가례』의 시행이 있었다. 유교가 주로 학문이나 정치사상으로 기능했던 과거와 달리 『주자가례』라는 수단을 통해, 일상생활까지 규제해오자, 조선사회 전반에서는 많은 충돌과 변화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중기 이후 본격화된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6세기 이후 『주자가례』의 시행은 널리 확산되었고, 17세기에 이르면 예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바탕으로 정밀한 『주자가례』 실천을 추구하게 되었다. 17세기 전반 조선의 예학자들은 『주자가례』의 실천 과정에서 제기된 수많은 문제와 의문들을 해결하고, 이것을 조선의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활발하게 예설을 교류하였다.

17세기 전반 『주자가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논의들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주자가례』를 실제로 적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과 당시의 처한 사회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주자가례』는 대체로 세세한 설명은 번다한 문식(文飾)으로 보아 생략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소략함은 한편으로 모든 예의 절차와 변례(變禮)에 대처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고, 수많은 억설들을 낳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서로 다른 시ㆍ공간적 배경으로 인한 문물제도의 차이는, 『주자가례』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종법(宗法)이었다. 이는 고대 중국사회의 친족제도로 조선의 기존 제도와는 다른 형태였다. 이것 때문에 종법이 운영되지 않았던 조선사회에서는 이를 기초로 한 『주자가례』 시행도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것 외에도 고례(古禮)와 국제(國制), 그리고 속례(俗禮)와 같은 다양한 의례(儀禮)의 기준이 혼재해 있던 사회 현실은, 『주자가례』를 실천 방향으로 삼아 예를 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주자가례』의 실천이 더욱 강조될수록 수많은 논의들이 제기되었다. 먼저 종족(宗族)의 유지를 위한 가계계승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하면서, 후사(後嗣)를 선정하고, 입후(立後)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여기에서는 기존 관습과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입후(立後)가 증가하면서, 수반되는 문제들도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한편 상례(喪禮)를 치름에는 최대한 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상복(喪服)을 입고, 거상(居喪)하려는 노력이 가해지게 되었다. 이 때에 『주자가례』 내용의 누락이나 인정상의 충돌로 인해 많은 의문이 발생하였다. 한편 조상에 대한 봉사(奉祀)를 중요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가묘(家廟)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데 따른 논의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예학자들은 『주자가례』 실행을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종법적 원칙에 대해 합의하고 이를 강조해갔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조선현실에서 실행 가능한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는 시의에 따른 절충과 변용을 통한 것으로 가변적인 예의 속성상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예학자들은 종법질서의 운영을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국제와 오랜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조선현실에 맞는 『주자가례』 실천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항들은 이후 조선후기 『주자가례』의 실행에 큰 기준을 형성하였다.

참고문헌

  • 김시황, 「려말 선초 ≪주자가례≫의 전래와 수용」, 『동양예학』 제30집, 동양예학회, 2013.
  • 장정호, 「作爲家庭儀禮敎書的『朱子家禮』的性格與意義」, 『교육사상연구』 제24권 3호, 한국교육사상연구회, 2010.
  • 지현주, 「『주자가례』에 내재된 방위관과 질서의식에 관한 연구 : 통례 및 관례와 혼례를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제74집, 동양철학연구회, 2013.
  • 황원구, 「주자가례의 형성과정-왕법과 가례의 연계성을 중심으로」, 『인문과학』 45권,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