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청(舟師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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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광해군 10)에 강화도의 해상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기구.

개설

조선의 서해안 수군 진관체제는 17세기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북방 위협이 고조된 결과였다. 이 중 특히 강화도에 대한 방어에 집중했다. 그 결과 1618년(광해군 10)부터 본격적으로 강화도 수군의 강화 조치가 실시되었다. 주사청의 설치는 당시 강화도 수군 방어체제의 시초를 만드는 계기였으며(『광해군일기』 10년 6월 28일), 주사청이 설치되면서 경기수군은 크게 강화되었다. 강화도가 가지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성격은 1619년(광해군 11) 동부승지조찬한이 강화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강화는 한강과 예성강의 하류에 위치한 우리나라 4대 도서(島嶼) 중 하나이다. 개성·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수로에 연결된 까닭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류의 요로(要路)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수도를 위협하는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앙정부의 피난처로 손꼽히던 지역이 바로 강화였다. 실제로 고려 대몽항쟁 이래 전시마다 강조된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역대 전쟁 과정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착안하여 조선 정부는 강화도를 ‘보장처(保藏處)’로 설정하고 방비에 중점을 두었다.

조직 및 역할

주사청은 임시기구로 강화도연미정(燕尾亭)에 설치되었다. 주사청의 최고 책임자인 주사대장에는 당시 광해군의 최측근이었던 동지중추부사이응해(李應獬)가, 중군에는 무신당상 양호(梁護)가 각각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6월 7일). 주사청이 설치되면서 경기수군은 크게 강화되었다. 조선 정부는 1618년(광해군 10) 육조 및 해서와 하삼도에서 전선 80척 이상을 건조하여 강화도 앞바다에 집결하도록 결정하였다. 한편 필요 병력 확보를 위해 부근 어민들을 사공·격군으로 충당하거나, 강화도 속오군을 수군으로 동원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6월 28일). 이렇게 모은 전력으로 주사청이 하고자 했던 것은 수군의 훈련이었다. 훈련 장소는 양화도 망원정(望遠停)으로 결정되었는데, 망원정은 큰 전함이 들어오기 좋은 자연조건을 가진 데다가 서울과 가까워 왕이 쉽게 나가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일시는 1619년(광해군 11) 9월 29일로 결정되었지만 대신들의 반발로 1621년(광해군 13)까지 지속적으로 연기되다가 결국 실시되지 않았다.

변천

광해군의 경기수군 강화는 많은 반발을 야기했다. 전선 건조는 각 지역의 부담 증가로 이어져 주민들을 곤궁하게 한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1620년(광해군 12) 중국 사신 접대에 따른 재정 문제로 주사청을 폐지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이후 1621년(광해군 13) 8월 이후부터는 존속 여부를 알 수 있는 사료들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광해군일기』 13년 8월 10일), 적어도 1621년에는 주사청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송기중,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개편」, 『조선시대사학보』53, 조선시대사학회, 2010.
  •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鎭撫營의 창설」,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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