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모(周文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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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순교한 중국인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개설

주문모(周文謨)는 중국 소주의 곤산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예수회의 중국 선교가 시작된 이래 천주교 신앙이 융성한 지역이었다.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했다. 30세 때 북경 교구의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여 중국인 최초의 졸업생이 되었다. 후에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달라는 이승훈의 요청에 따라 구베아 주교의 명령으로 1789년(정조 13) 조선에 파견되었다. 입국 후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서울과 충청도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다 조선에 입국한 지 7년 만에 자수하였고(『순조실록』 1년 3월 15일), 추국을 받은 뒤 참수당했다.

활동 사항

18세기 후반, 200여 년간 지속되던 예수회의 중국 선교 활동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상제·천주 등의 용어 문제, 제사 문제 등으로 촉발된 전례(典禮) 논쟁 끝에 로마 교황청은 1773년 예수회를 해산시켰고 그 이후 중국에는 소수의 예수회원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83년 부친을 따라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이 1784년 초 북당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梁棟材], J. J. De Grammont) 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후 이승훈은 주변인들에게 천주교를 전하는 한편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통해 평신도끼리 미사를 집전하였으나 점차 서양인 선교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결국 1789년 윤유일(尹有一)을 중국 천주당에 파견한다. 윤유일은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이승훈의 서한을 가지고 구베아 주교를 만난다. 조선에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베아 주교는 크게 고무되었지만 중국 내 교회의 약화와 조선에서의 교난(敎難) 등 복잡한 상황에 따라 결국 파견 요청을 받은 지 5년이 지나서야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파견한다. 조선의 신앙 공동체가 요구했던 것은 수학과 의학 등을 좋아하는 정조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양인 선교사였으나 실제 파견된 것은 조선인들과 외모가 유사한 주문모였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파견된 것은 1794년(정조 18)으로, 이미 1785년(정조 9)의 을사교난, 1791년의 진산사건 등 두 차례에 걸쳐 교난이 발생한 뒤였다. 그가 조선에서 머물렀던 7년은 조선의 천주교 교회 공동체가 점차 조직화되면서 확대되어가던 시기였다.

주문모가 입국한 지 6개월 만인 1795년(정조 19) 6월 27일 밀고자의 고발로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가까스로 주문모는 피신했지만 그를 도왔던 윤유일과 지황(池璜)과 최인길(崔仁吉) 등이 체포되었고, 윤유일은 체포 다음 날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 이후로는 충청도 쪽으로 남하하여 피신했다 귀경하는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포교하다 1801년(순조 1)에 의금부에 자수하였고 조사를 받은 뒤 효수되었다.

참고문헌

  • 조광, 「주문모의 조선 입국과 그 활동」, 『교회사연구』제10집, 1995.
  • 편집부, 「주문모 연보(1752~1801년)」, 『교회사연구』제10집,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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