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정성(宗貞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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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정(室町)시대 전기 무장이자 제9대 대마도 도주

개설

대마도(對馬島) 제8대 도주(島主) 종정무(宗貞茂)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418년 종정무가 사망한 후 뒤를 제9대 대마도 도주가 되었다.

활동사항

도주 등극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립 관계에 있었던 인위종씨(仁位宗氏)와 조전좌위문대랑(早田左衛門大郞) 등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당시 왜구 활동이 활발하자 1419년(세종 1)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조선에서는 기해년에 있었던 사건이라 해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일본 연호를 붙여 응영(應永)의 외구(外寇)라고 칭하였다.

조선 정부는 건국 후 왜구의 침구를 막기 위하여 교린 정책(交隣政策)을 취하였다. 종정무가 대마도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에는 조선과 교류 관계를 맺어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고 종정성이 어린 나이로 도주가 되자 대마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왜구 두목 삼미타라(三味多羅)는 명나라를 약탈하러 가는 도중에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조선 연안에 들러 약탈을 자행하였다.

1419년 조선에서는 대마도에 있던 대규모의 왜구들이 명나라에 침구하러 가는 도중이었으므로 그 틈을 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토벌하고 귀로를 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후 조선에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회유하려 하였고, 대마도 도주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함으로써 교류 관계는 회복되었다. 조선 정부는 조선을 왕래하는 통교자가 증가하자 치안·경제상의 부담과 대마도 정벌 이후 갖게 된 왜구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일본 국내정세에 대한 지식의 확대 등을 배경으로 일본으로부터의 통교자를 제한하는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대마도를 기미 관계(羈縻關係)의 외교 질서 속에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1426년(세종 8) 종정성은 조선에 대마도 도주 문인제(文引制) 실시를 제안하였다. 문인은 본래 상인들에 대한 통제와 세금 징수 그리고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던 일종의 통행증명서로 행장(行狀) 또는 노인(路引)이라고도 하였다. 1438년(세종 20)에 이예(李藝)가 종정성과 문인제도를 정약(定約)하면서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를 제외한 모든 통교자는 대마도 도주가 발행하는 문인을 가지고 조선에 와야만 접대와 교역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특히 문인에는 사송선(使送船)의 크기와 승선인의 이름, 인원수 등을 기재하도록 하였다.

대마도주는 문인제도를 이용하여 도내의 통교자들을 통제하고 문인 발행에 대한 수수료와 교역품에 대한 과세를 함으로써 도내에서의 정치·경제적인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대마도 도민이 조선의 삼포(三浦)에 마음대로 거주하고 있었던 항거왜(恒居倭)를 조선의 요청으로 송환하고 대신 60명 범위 내에서 조선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게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조선과 조어금약(釣魚禁約)을 체결하여 전라도 남해에 있는 고초도(孤草島)로 가서 어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세종실록』 23년 11월 22일). 1442년(세종 24) 종정성이 고초도의 조어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주기를 청하여 조선에서 감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24년 6월 17일).

1443년(세종 25)에는 조선의 제안으로 대마도 도주의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고, 도주에게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를 쌀과 콩 200석으로 하며,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정해진 숫자 외에 특송선(特送船)을 보낼 수 있다는 내용의 계해약조(癸亥約條)가 체결되었다. 무역선인 세견선과 조선에서 대마도주를 비롯한 도내의 중소 세력가에게 매년 내려 주던 쌀과 공인 세사미두에 관한 조항은 시기에 따라 그 수에 가감이 있었지만 조선전기에 기본 약조로서 계속 유지되었다. 계해약조를 계기로 다른 통교자들도 세견선을 정약해야만 도항하여 접대를 받을 수 있었다. 종정성은 이렇게 조선과 관련한 제 권익을 이용하여 대마도 내의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지배권을 강화해 갔다.

종정성은 조선과의 관계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지만 구주 쪽에서는 소이씨가 쇠퇴하면서 입지가 불리해졌다. 1444년에는 비전(肥前)의 춘일악(春日岳)에서 대내(大內)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동생 종성국(宗盛國)과 종성세(宗盛世)가 전사하였고, 축전(筑前) 등지에 있었던 영지도 모두 빼앗겼다.

참고문헌

  • 三宅英利 著, 손승철 譯,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론과실천, 1991.
  • 요시노 마코토 지음, 한철호 옮김,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책과함께, 2005.
  •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2, 자작나무, 1998.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한문종, 「조선초기의 向化倭人과 李藝」, 『한일관계사연구』 2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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