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정국(宗貞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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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室町)시대 후기의 무장이자 대마도의 제11대 도주(島主).

개설

제10대 대마도 도주였던 종성직(宗成職)의 사촌으로 종성직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467년 그의 뒤를 이어 도주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종성국(宗盛國)은 제9대 대마도 도주 종정성(宗貞盛)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인위종씨(仁位宗氏) 출신이었다. 14세기 중엽에 시작된 종씨(宗氏) 본가와 서자(庶子)인 인위종씨의 대립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는데 양쪽의 혈통을 이은 종정국이 집안을 잇게 되면서 대립은 해소되었다.

활동사항

조선과 관계된 이권을 이용하여 종씨 일족(一族)과 대마도 내의 다른 일족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정책이 이전의 종정성 때 특히 적극적으로 시행되었었는데, 종정국 때에 이르러 결실을 보았다. 종정국이 인위종씨의 혈통도 잇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대마도 내에서의 일원지배를 거의 완성할 수 있었다. 종정국은 조선으로부터 조선과의 통교에 필요한 도서(圖書)를 발급받고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 정약(定約)을 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통교권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1469년,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이 그때까지 대마도에 망명해 있던 소이뢰충(少貳賴忠)을 구주 본토로 출병시켜 대내씨(大內氏)를 공격하게 하여 대재부(大宰府)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구주에 있었던 소이씨(少貳氏)와 종씨의 옛 영지를 되찾았다. 그러나 소이뢰충이 비전(肥前) 천엽씨(千葉氏)의 내정에 간섭하고 종정국에게 강제로 출병하게 한 결과 종정국이 대패함으로써 소이씨와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1471년 조선에서 종정국이 구주의 영지를 회복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선위관(宣慰官)전양민(田養民)이 대마도에 온 것을 계기로 종정국은 무단으로 대마도로 돌아왔다. 1478년 9월 대내정홍(大內政弘)이 소이정자(少貳政資)와 결전을 하게 되었을 때 종정국은 대내씨의 부름에 응하여 소이씨에게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소이씨는 완전히 패배하여 비전으로 도주하였다.

종정국은 1492년에 아들 종성정(宗盛貞)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494년에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에는 1495년(연산군 1) 11월에도 종정국의 사자가 왔고(『연산군일기』 1년 11월 20일) 1496년(연산군 2) 2월에 종정국의 사망을 알리는 사자의 파견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종정국의 사망을 1495년 말 또는 1496년 초로 인식하고 있다. 한편, 종정국이 1446년(세종 28)에 조선으로부터 쌀과 콩 15석(石)을 받았는데(『세종실록』 28년 8월 2일), 아버지인 종성국 때에는 해마다 쌀 50~60석, 혹은 80석까지 주었던 것을 15석만 준 것에 대하여 그 전의 예에 의거하여 내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결과 조선 조정에서 해마다 미두(米豆) 20석을 주었다(『세종실록』 30년 5월 13일). 조선에서는 대마도를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조선의 외교질서 속에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대마도주를 비롯한 도내의 중소세력가에게 매년 쌀과 콩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을 세사미두(歲賜米豆)라고 한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대마도주를 비롯하여 14명에게 많게는 200석에서 적게는 10석에 이르기까지 세사미두를 지급하였으며, 한 해에 350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三宅英利 著, 손승철 譯,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론과실천, 1991.
  • 요시노 마코토 지음, 한철호 옮김,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 책과함께, 2005.
  •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2, 자작나무, 1998.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辞典』, 吉川弘文館,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