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지(宗義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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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번의 초대 당주.

개설

일본의 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부터 강호시대(江戶時代) 전기에 걸쳐 활약한 일본의 무장 겸 대명(大名)이다. 종씨(宗氏) 가문의 19대 당주(當主)이자 대마번의 초대 번주로 대마번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함께 침략군의 선봉에 섰으며, 임진왜란 이후 강화교섭과 조일 국교 수립에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다

가계

1568년 종가(宗家)의 제15대 당주인 종장성(宗將盛)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79년 종가의 17대 당주인 종의조(宗義調)의 양자가 되면서 가독(家督)을 이어 종가의 제19대 당주가 되었다.

초명은 소경(昭景)이다. 소경은 실정막부(室町幕府)의 제15대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로부터 소(昭)라는 한자를 받은 것이다. 후에 풍신수길(豊臣秀吉)로부터 수길의 예전 성이었던 우시(羽柴)라는 성과 이름의 길(吉)이라는 한자를 받아 우시지길(羽柴吉智)로 개명하였다. 법명은 만송원(萬松院)이다. 1590년 임진왜란에 참여한 소서행장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였으나 관원[關ヶ原] 전투 이후에 헤어졌다.

활동 사항

1587년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이며 제17대 당주였던 의조가 당주로 복귀하자 의지는 가독에서 물러났는데, 풍신수길의 구주 정벌 때문이었다. 의지는 의조와 함께 축전(筑前)의 상기(箱崎)에 있는 수길의 주둔지에 출두하여 대마 일원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당시 수길은 조선 침략을 준비하면서 의지와 의조 두 사람에게 조선이 일본에 ‘입조(入朝)’, 즉 일본에 와서 조회하도록 교섭할 것을 명하였다. 1588년 의조는 교섭이 진행되던 도중에 사망하고, 의지가 뒤를 이어 도주가 되었다.

조선과의 교섭에 관한 풍신수길의 독촉이 계속되자 의지는 고심 끝에 조선에 일본의 전국통일을 축하하는 축하사절을 보내도록 절충하여 요청한 결과 1590년에 조선의 통신사황윤길(黃允吉) 일행의 도일이 이루어졌다. 당시 의지는 일행과 함께 경도(京都)에 올라가 수길과의 회견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공으로 의지는 통신사 일행이 귀국한 이후 종사위하시종(從四位下侍從)에 서임되었다.

다만 수길이 조선 사절에게 전한 문서는 명나라 정복에 관한 취지를 조선에 전한 것으로, 명을 종주국으로 하는 조선 왕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은 아니었다. 의지는 수길의 조선 침략이 불발에 그치게 하기 위해서 소서행장·도정종실(島井宗室)·경철현소(景轍玄蘇) 등과 이것을 적당히 처리하기 위한 계획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 자신이 직접 조선에 건너와 절충에 임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1592년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에서 종의지는 장인 소서행장과 함께 침략군의 선봉에 서서 참전하게 된다. 그는 16세부터 53세에 이르는 대마도의 남자를 모두 동원하여, 1592년 4월 12일 5천여 명을 이끌고 대마도 북단에 위치한 대포(大浦)를 출항하여 부산에 상륙하였다. 1593년 4월 13일에 의지는 소서행장과 함께 총공격을 시작하였으며, 충주 전투에서는 신립(申砬)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이후 서울을 점령하고, 5월에는 평양을 공격하였다(『선조실록』 26년 7월 16일). 그러나 명군이 전쟁에 참여하고 조선의 관군이 정비되면서 이듬해 1월 7일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의 4만의 군대와 김명원(金命元)이 이끄는 1만 명의 조선군이 연합하여 평양을 공격하자 퇴각하게 되었다.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면서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는데, 의지는 1593년 명나라 장수 사용재(謝用榟) 등을 수행하여 비전(肥前)의 명호옥(名護屋)에 주둔한 수길과 만나게 하였다. 1595년에는 수길로부터 살마(薩摩)출수군(出水郡)의 영지 1만 석을 더 받았다.

1596년에 명의 책봉사(冊封使)양방형(楊方亨) 등이 도일하자 의지는 이들을 대판성(大坂城)으로 안내하여 수길과 만나도록 주선하였다(『선조실록』 29년 12월 21일). 그러나 결국은 조선과 명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풍신수길은 1597년에 다시 조선 침략을 지시하였다. 이때 종의지는 다시 소서행장 등과 조선에 건너가 전쟁에 참여하였고, 수길로부터 조선의 거제도를 영지로 받았다. 1598년 풍신수길이 사망하면서 임진왜란이 종결되자 의지는 대마에 돌아갔지만 조선과의 무역 두절과 전쟁으로 대마가 받은 타격은 대단히 컸다.

풍신수길 사후 덕천가강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을 관원 전투에서 물리치고 전국의 패권을 장악한 후 1603년에 강호에 막부를 개설하였다. 관원 전투에서 종의지는 장인인 소서행장을 따라 서군에 속해 복견성(伏見城) 공격에 참여하는 등 덕천가강의 반대편에 속하였다. 관원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자 서군의 대명 대부분은 영지가 몰수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는데, 특히 장인이었던 소서행장이 참수형에 처해지면서 종의지의 입지도 불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의지는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원하던 덕천가강에 의해 사면을 받아 영지는 보전되었고, 대마번(對馬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종의지는 임진왜란 이후 강화교섭과 조일 국교 수립에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다. 풍신수길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덕천막부(德川幕府)는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하였다. 그래서 덕천가강은 조선전기 이래 조선과의 외교 창구 역할을 맡고 있던 대마도의 종씨에게 조선 측과 서둘러 통신사 교류의 재개를 논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종의지는 조선 정부에게 국교 회복을 위해 빠른 시일 안에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조선으로부터 제1차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파견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609년에는 조일 간의 국교 회복을 위한 기본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기유약조(己酉約條)의 체결을 주선하여 강호막부의 대조선 관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조선과의 독점적인 무역권을 허가받게 되었다.

그는 1615년 1월 3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후계는 장남 종의성(宗義成)이 이었다. 종의지가 사망하자 조선 정부는 조일 국교 회복에서의 그의 역할을 인정하여 1622년에 도서를 지급하고 만송원송사(萬松院送使)의 파견을 허가하여 조의를 표하였는데, 1625년 5월 만송원송사의 제1선이 도항하게 되었다. 만송원은 종의지의 시호[法名]이자 원당[菩提寺]의 명칭이다.

묘소

장기현(長崎縣) 대마시(對馬市) 엄원정(嚴原町) 만송원(萬松院)

참고문헌

  • 이훈, 『대마도, 역사를 따라 걷다』, 역사공간, 2005.
  • 『長崎縣史』, 古代·中世編, 吉川弘文館, 1980.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田井友季子, 『對馬物語』, 光言社, 1991.
  • 田中健夫, 「宗義智-離島の勇將」, 『對外關係と文化交流』, 思文閣,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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