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鐘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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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종을 걸어놓고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건물.

개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성곽을 쌓고 중심부에 종각(鐘閣)을 만들었다. 종각에는 종을 걸어서 필요한 시간에 종을 울려 알렸다. 야간에 도성문을 닫는 인정(人定) 때, 새벽에 통금을 해제할 때, 도성 문을 여는 파루(罷漏)를 알릴 때 종을 쳤다. 종각의 시간은 관상감에서 정하여 운영하도록 했다.

내용 및 특징

『정조실록』 1787년(정조 11) 8월 26일자 기록에는 “한양에 일찍부터 종을 둔 곳이 모두 세 곳이었다. 첫째는 광화문인데 지금의 부어교종각(鮒魚橋鍾閣)이고, 둘째는 누가(樓街)이니 지금의 종각이고, 셋째는 종현(鍾峴)이니 현재는 종이 보존되지 않고 고개 이름만 전한다.”고 하였다(『정조실록』 11년 8월 26일). 『궁궐지』에는 종루와 종각이 서로 다른 건축물이라고 하였다. 종루는 중부 운종가(雲從街)에 있는데 1395년(태조 4)에 건립하였다고 했고, 종각은 경복궁의 광화문 밖에 있는데 1457년(세조 3년)에 큰 종을 만들어 길거리에 매달아놓고 종각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했다. 이처럼 조선초에는 종각과 종루를 구분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종각과 종루를 구분 없이 썼으며 종각이라고 하면 모두 운종가의 종루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종각이 위치한 곳이 도성의 중심부였던 관계로 거지들이 많이 운거하거나 정부에서 기민을 구휼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변천

한양의 종루 건립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 초부터 시작되었다. 1396년 12월 7일에는 태조가 직접 종루에 거둥해서 새로 주조한 종을 보았다. 1398년 윤5월 10일에는 경루(更漏)를 종루에 설치하였다. 경루는 물시계의 일종으로 저녁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였다. 태조대에 만들어진 종루는 태종조에 새롭게 자리를 옮겼다. 『태종실록』 1413년(태종 13) 2월 6일자 기록에 의하면 새로 건립한 종루는 청운교 서쪽, 순금사 남쪽, 광통교 북쪽에 있었으며 2층이고 5칸이었다고 한다(『태종실록』 13년 2월 6일).

조선초에 만들어진 종루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전란 이후인 1619년(광해군 11) 4월에 다시 종루를 만들었고(『광해군일기』 11년 4월 14일), 이때 만들어진 종루는 1686년(숙종 12) 1월에 또다시 화재를 당했다. 이때의 화재는 큰 불이 아니었던지 3일 만에 복구를 모두 마쳤다. 1864년(고종 1) 4월 20일에도 운종가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다. 사경(四更)에 지전(紙廛)에서 화재가 발생해 종각까지 번졌는데 종은 무사했지만, 종각은 새롭게 건립해야만 했다.

1895년에는 고종이 직접 ‘보신각(普信閣)’이라는 현판을 내렸고 이후 종루는 보신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보신각을 촬영한 사진이 몇 점 전하는데 보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보신각 건물은 6·25전쟁으로 파괴되었고, 1953년 12월 12일 그 위치에서 20m 뒤로 물러난 곳에 새롭게 건립되었다. 현재 보신각지에 위치한 건물은 1979년 8월에 서울시에서 건립한 것이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의 문화재』 1~5권, 서울특별시,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