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흘강(照訖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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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에서 소과[생원·진사시] 초시를 치르기 전에 거쳐야 했던 『소학』 고강.

개설

조흘(照訖)이란 ‘확인필’의 뜻으로, 과거를 보기 전에 과거 응시에 결격 사유가 없는 자인지 확인하고 『소학』을 구술시험으로 고강(考講)하여,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녹명(錄名)을 하고 과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인조실록』 1년 9월 24일). 이때 실시하는 『소학』에 대한 고강을 조흘강이라고 하였다. 대소과의 복시 전에 시행하는 전례강[대과]과 학례강[소과]도 넓은 의미의 조흘강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조흘강이란 소과초시 전에 보는 『소학』에 대한 고강을 말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흘강은 기일을 정해 놓고 시행하는데, 개강일·파강일과 장소를 미리 공고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순조실록』 18년 5월 29일) 초시가 시행되기 한 달 전에 고강을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효종실록』 10년 2월 16일)(『정조실록』 15년 9월 2일). 그 실제 사례는 경주부에서 “각 면(面)별로 날짜를 나누어 조흘강을 시행한다.”는 문서를 용산서원에 내린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정해년(서기년도 미상) 7월 20일부터 8월 1일까지 몇 개의 면을 한 데 묶어 차례로 이틀씩 조흘강을 실시한다는 문서를 조흘강 개시 보름 전인 7월 5일 용산서원에 내리고 있었다. 이 문서에는 지정된 날짜를 어기면 추후 고강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니 명심하도록 잘 알릴 것과, 글공부도 하지 않는 무리들[閑雜之類]이 함부로 고강에 나섰다가 구두(句讀)에 잘못이 있고 글의 뜻에도 불통(不通)인 것이 발각되면 사목(事目)대로 엄히 다스릴 것이니 각별히 신칙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14개의 면에 배정된 조흘강 실시 날짜가 명기되어 있었다.

    1. 00016216_그림1_경주부의 조흘강 시행공고

조흘강의 시관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인원수의 변동이 있으나, 한성의 경우 고시관(考試官)과 함께 사관(史官) 1명을 반드시 감시관(監試官)으로 배치하였다. 성균관과 예문관·승문원·교서관 관리들이 고강을 주관하는 한편, 사관이 배정되어 고강의 시험규정인 강규(講規)와 과거장을 감찰하고 조흘강을 마친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던 것이다(『정조실록』 15년 8월 13일)(『정조실록』 21년 7월 25일). 선공감(繕工監)에서 한성의 대소문무과 각 시소(試所)·조흘소 등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한 내용을 보면, 두 군데 조흘소 각 8명의 관리에게 책상·벼루갑·사모걸이·옷걸이·촛대 등을 지급한다고 되어 있었다.

조흘강을 통과하고 초시에 입격하여 회시 전에 치르는 학례강에서 탈락한 이들이 많으면 조흘강 통과를 남발하였다는 것이므로 해당 조흘강 시관이나 수령은 처벌받았다(『순조실록』 18년 5월 29일).

변천

조흘강은 『경국대전』에 그 규정이 없던 것으로 명종대에 시발하여 100여 년 간에 걸쳐 조성된 것이다. 전에 없던 조흘강을 새로이 시행한 동기는 두 가지였다. 과거 응시자가 아닌 자와 실력이 못 미치는 응시자, 이 두(2가지) 부류가 과거장에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조흘강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1551년(명종 6) 7월 4일 마련된 『과거사목』 「구사목」 ‘식년생진문과초시시응행절목(式年生進文科初試時應行節目)’에 나타나는 조흘강 시행 동기를 살펴보면, 과거 응시자가 필체가 좋은 자를 데리고 들어가거나 실력이 못 미치는 단순 관광자들도 응시하는 탓에 과거 시험장이 난잡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절목에는 아직 고강 과목이나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초시 전에 예비시험을 시행하는 취지가 무엇이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과거 시험장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은 이전에도 마련된 적이 있는데, 중종대에 작성된 보단자(保單子) 규정이 그것이었다(『중종실록』 1540년 8월 20일). 이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흔구자(痕咎者)가 과거장에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조흘강은, 비록 과거에 응시하는 데에 하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단순 관광자 또는 대필자로 인해서 과거 시험장이 번잡해지거나 부정행위가 일어날 우려를 막기 위하여 구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전의 보단자 규정만으로는 가계 또는 본인에게 하자가 있는 흔구자가 아닌 한 단순 관광자나 대필자가 과거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속대전』에 의하면, 이서·공생에 대해서는 과거 시행일에 비변사에 모두 소집하여 일일이 점호를 함으로써 혹시 대필하러 과거장에 따라 들어갈 가능성을 차단하는 규정까지 두었다.

이런 취지와 함께, 조흘강은 사습(士習)을 바르게 하려는 취지와 유생들의 학업 수준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다. 과거에 응시하려는 유생이 초시 전에 『소학』을 고강하는 조흘강을 통과하였는지 확인하고 녹명하는 것은 사습을 바르게 하고 혼잡을 막기 위한 것이며 응시자의 학문이 과거에 나아갈 만한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당초에 조흘강은 대소과를 막론하고 처음 응시하는 유생이라면 통과해야 할 구술시험이었고 과목은 『대학』·『중용』이었다. 생원·진사시·문과초시 때에 과거에 처음으로 응시하는 유생은 『중용』과 『대학』의 각 한 군데를 배강(背講)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거둔 자를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녹명할 때에 이와 대조하여 확인한 다음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다(『명종실록』 53년 6월 9일). 시험 성적은 보통 우수하면 통(通), 보통이면 약(略), 미흡하면 조(粗), 탈락이면 불(不)로 구분하였는데, 조흘강 통과 기준은 낙제를 겨우 면한 조 이상이었다. 이런 규정은 당시 작성된 『과거사목』에 반영되어 있으며, 사헌부·사간원의 서경(署經)을 거치고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되었다.

『과거사목』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한 1553년(명종 8) 9월 이후, 조흘강 규정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유성룡도 1554년 『중용』·『대학』을 고강하는 조흘강을 거쳤으며, 실록 기사도 이런 조흘강의 시행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명종실록』 9년 1월 19일). 그러나 이 새로운 제도의 시행이 원활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554년(명종 9) 과거 시행 과정에서 과거 응시자 명단 부거도목(赴擧都目)에 실리지 않은 유생과 조흘강을 거치지 않은 유생들이 고강이 종료된 이후 질병이나 연고(緣故)를 이유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경우가 80여 건에 이르러 이에 대한 처리를 논의하도록 하거나(『명종실록』 9년 7월 28일), 과거 응시자 명단에 올라 있지 않은 유생과 조흘강에 불참한 유생을 모두 일정 기간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정거(停擧) 처벌을 내려 그 수가 400여 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는 평소에 공부를 게을리하여 조흘강에 통과하지 못한 경우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질병이나 연고가 있어 2월 이전에 고강하지 못한 유생들까지 모두 과거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인 듯하니 재차 고강하여 처리하자는(『명종실록』 1554년 8월 20일) 등 혼선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조흘강 규정을 어긴 유생들에 대한 처리 논의 기사는 조흘강 규정이 마련되자 바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동시에 그 새로운 정책의 시행이 원활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제도의 시행 초기에 빚어진 이러한 혼선은 어찌 보면 그리 무리한 현상이었다고 보기 어렵고, 정작 조흘강의 시행에 심각한 교란을 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왜란과 호란이었다고 추정하는 게 타당하다. 전란은 각종 장부의 소실, 민생의 황폐 등으로 인하여 민·관 공히 기존 규정의 준수에 대하여 느슨해지도록 하는 데에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초 『대학』·『중용』에 대한 고강을 대소과 모두에 대하여 적용하는 것으로 출발한 조흘강이 소과에 대해서만 『소학』을 고강하는 것으로 조정된 것도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미 1558년(명종 13)에 『중용』·『대학』에 대한 고강을 먼저 하고 『소학』에 대한 고강을 나중에 하는 것은 순서에 문제가 있다는 건의가 있었고(『명종실록』 13년 9월 30일), 임진왜란 이후 1623년(인조1) 이듬해 거행될 증광감시의 초시에 응시하는 유생에게 『대학』·『중용』·『소학』 중 하나를 고강하여 조흘한 뒤 과거 응시를 허락한다고 하다가(『인조실록』 1년 5월 15일), 석 달 뒤 『소학』만을 고강함으로써 조흘강으로 삼기로 정하였고 그대로 시행되었다(『인조실록』 1년 9월 24일). 소과에 대해서만 초시 전에 『소학』을 고강하는 것으로 조정된 과정을 더 이상 소상히 추적할 수는 없지만, 굳이 대과에까지 조흘강을 시행하려고 고집하지 않은 이유는 추정이 가능하였다. 그것은 소과가 시행되는 식년시나 증광시인 경우 소과에는 응시자가 대거 몰려들지만 이에 비하여 대과 응시자의 수는 현격하게 적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과거장이 난잡해질까 봐 응시자를 제한할 필요성이 낮았던 것이다.

혼선을 겪던(빚었던) 조흘강은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도 제자리를 잡아갔는데, 이전에 정해진 규정을 전란의 와중에서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다가 다시금 엄격히 적용하였고 이를 어긴 위반자를 규정대로 처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혼란을 수습한 뒤, 제도를 재정비하여 엄격히 시행하는 과정에서 규정을 어긴 자 상당수를 처벌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즉, 1623년 인조가 등극한 이후, 소과초시에 입격한 유생 중에 녹명을 하지 않은 자와 조흘첩을 소지 않은 자를 방목에서 빼버리도록 한 것이었다(『인조실록』 1년 9월 10일)[『인조실록』 9월 21일 1번째기사][『인조실록』 9월 24일 1번째기사]. 이후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1659년(효종 10) 송준길이 조흘강의 시기와 방식, 중점 사항 등 소학고강 조흘의 규정을 더욱 상세히 신명(申明)하였으며(『효종실록』 10년 2월 16일), 1660년(현종 1) 현종이 즉위한 직후 이 규정을 재차 확인하였다.

조흘강은 1553년(명종 8) 시발되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100여 년의 세월이 소요되어 결국 제도적 안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조흘강과 관련된 규정은 시간이 갈수록 엄격해졌다. 조흘강을 통과하였다는 증명서인 조흘첩은 과거장에 입장할 때 필요하였던 것은 물론이고 입장한 후에도 그 소지 여부를 점검하였으며, 심지어는 퇴장할 때도 검열하도록 하는 등 점점 더 엄격해졌다(『순조실록』 18년 5월 29일). 이러한 검열의 결과 허위 문서를 소지하거나 조흘첩이 없이 입장한 자는 군역에 충정(充定)시켰으며, 조흘강을 대신 고강하였을 경우에는 수군(水軍)에 충정하는 처벌을 가하였다(『정조실록』 24년 4월 3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육전조례(六典條例)』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과거사목(科擧事目)』
  • 『과시등록(課試謄錄)』
  • 『과장목기명정식(科場木器皿定式)』(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상정과거규식(詳定科擧規式)』
  • 『서애선생연보(西厓先生年譜)』
  • 『예방편고(禮房便攷)』
  • 『은대편고(銀臺便攷)』
  • 김경용, 『장서각수집 교육·과거관련 고문서 해제(권1)』(장서각연구총서 2), 민속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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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용, 「조선시대 과거제도 시행의 법규와 실제」, 『교육법학연구』 제16권 2호, 한국교육법학회, 2004.
  • 김경용, 「조선조의 과거제도와 교육제도」, 『대동한문학』 제40집, 2014.
  • 김경용, 「조선중기 과거제도 정비과정과 그 교육적 의의」, 『교육사학연구』 제20집 1호, 한국교육사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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