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차월미도(租借月尾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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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러시아가 군함의 연료인 석탄을 보급하는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인천항 부근 월미도를 조차하려던 일.

개설

개항 이후 인천은 청국과 일본은 물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의 이권을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한반도의 관문이었다.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과 인접한 곳으로는 인천이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도시였다. 인천은 청국의 천진·위해·대련·상해로 연결되는 황해의 항로가 집결되는 요지였다. 따라서 인천은 서울로 접근하는 요충지였다는 점 이외에도 청국의 주요 개항장과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곳이었으므로 이곳에 제국주의 열강이 선박의 연료인 석탄을 비축하기 위한 시설을 마련하려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인천항 앞의 월미도를 조차해서 석탄을 비축하려고 했던 것이다. 조차란 나라 간에 특별한 합의에 따라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특정 지역을 일시적으로 빌려주는 것이며, 그 대상이 된 땅을 조차지(租借地)라고 하였다.

역사적 배경

월미도는 인천항에 접안하는 함선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항로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월미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이미 일본·청국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에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월미도는 서울에 파견되던 각국의 군대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훈련을 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1894년(고종 31) 7월에 미국 해군소령 임페이(Robert. E. Impay)가 지휘하여 인천에 입항한 미국 군함 모노커시호의 해병이 월미도에 상륙해 야영하였다. 이들은 서울미국 공사관의 수비를 위하여 파견되었는데 월미도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서울로 가는 중이었다.

월미도에 대한 본격적인 조차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청일전쟁 이후 삼국 간섭의 결과 러시아가 한반도 내정에 깊이 관여하던 시기였다. 1895년 8월에 러시아는 월미도 남쪽의 차용지 중 870여 평의 땅에 석축을 쌓고, 그 안에 150평의 석탄고를 건축하기로 조선 정부와 합의한 뒤 미국인에게 공사를 의뢰하였다. 그런데 미국인이 공사의 진행을 일본인에게 의뢰하여 그 내용을 일본 정부가 알게 되면서 외교 문제화되었다. 당시 월미도의 서쪽에는 일본 해군의 석탄창고도 있었으나 섬 전체를 조차하지는 않았다.

반면 러시아가 대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아우르는 섬 전체를 조차하여 석탄창고·병원·사격장 등을 건설하려고 하자 일본은 이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였다. 1896년 러시아는 월미도의 10,000여 평의 땅을 3월부터 조선 정부에서 차용하였다. 그리고 소월미도 꼭대기에 측량기계를 설치하였고, 대월미도 남쪽에는 경사부와 해안을 포함해서 돌담 혹은 제교(梯橋)를 두어 구분하였다. 또한 해안에는 석탄고 등을 건설하면서 외국인의 상륙을 거절하고 있었다. 월미도에는 러시아 군함이 정박한 뒤 상륙한 수병들이 만취하여 인근 마을을 배회하다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고 강간을 하는 등 행패를 부려 한국인들의 적개심을 자극하였다. 그러므로 러시아에 대한 월미도의 조차는 조선 정부나 일반민에게 이르기까지 거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고 이것을 이용해 월미도를 차지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농간이 추가되어 국제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발단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청국에게 배상과 할양을 요구하던 것을 러시아가 삼국 간섭을 통하여 저지하면서 한반도의 정세에 러시아가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조선의 이권 쟁탈을 위하여 일본과 각축을 벌였고 한반도 내 유리한 군사기지의 확보를 위하여 인천·마산 등의 군항 및 연료 저장고를 확보하려고 시도하였다. 러시아의 그런 시도 중의 하나가 인천항 앞의 월미도 조차였던 것이며, 일본도 그것을 저지하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자신들이 월미도를 조차하려고 하였다.

경과

러시아가 월미도를 조차하기 전에 일본 해군은 이미 석탄창고를 월미도 서쪽에 설치하였다. 일본은 1890년(고종 27) 12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종묵(閔種默)과 대리공사(代理公使)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 사이에 월미도 부지 조차약정서를 체결하여 섬의 일부를 조차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식 명칭은 조차월미도지기약단(租借月尾島地基約單)이었다. 그 내용은 일본 정부가 해군을 위한 창고를 건조하고 석탄을 저장하기 위하여 조선의 경기도 월미도 중의 부지 총 4,900평을 조차한다는 것이다. 이 부지의 조차액(租借額)은 매년 은화 80원(圓)으로 정하며, 약정을 교환한 날로부터 계산하여 일본공사관에서는 매년 양력 12월 15일에 이듬해의 조차액을 미리 통리아문(統理衙門)에 교부한다고 하였다(『고종실록』 27년 12월 12일). 조선후기에 월미도에는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과 군사 시설이 설치되었던 관계로 섬의 다수가 관유지였으므로 조차 비용을 국가에서 받은 것이다.

조선 정부가 월미도를 러시아에 조차한 것은 1895년 이후였다. 당시 조차 관련 외교 업무를 진행한 것은 외무 행정을 관장하던 외부(外部)였다[『고종실록』 광무 2년 3월 2일 1번째기사]. 1896년 6월 중 조선 정부와 러시아 공사 사이에 성립된 월미도차지조약서(月尾島借地條約書)를 보면, 러시아 해군이 석탄고, 병원, 울타리와 제반 필요한 가옥을 짓기 위하여 월미도 서남쪽의 토지를 조차한다는 것이었다. 그 면적은 모두 44,316㎡였으며, 조차 금액은 매년 은화 361원 76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 제국 정부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월미도의 추가 조차를 조선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 관계를 인지하였으므로 추가적인 월미도 조차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한반도 침탈이 시작되면서 월미도의 권리도 일본이 좌우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러시아대장성, 김병린 역,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 열강과의 조약』, 유풍, 1983.
  • 와다 하루키, 이경희 역,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제이앤씨, 2011.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