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훈(祖承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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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에 가장 먼저 파견되어 1차 평양성 전투에 참가한 명군 장수.

개설

명나라 말기의 요동총병(遼東摠兵)이다. 임진왜란 당시 부총병(副摠兵)으로 3천 명의 군사를 데리고 1차 원병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해 요동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다시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가계

아버지는 좌도독(左都督)조인(祖仁)이며, 아들은 장령(將領)조대수(祖大壽)이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나라는 요동의 부총병조승훈에게 요동 수비병 3천 명으로 구원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원병이었다. 조승훈이 평양성을 공격한 것은 1592년 7월 17일이었다(『선조실록』 25년 7월 20일). 조승훈은 오랑캐들과의 전투에 익숙해서 일본군을 가볍게 여겼고,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의 수효가 적다는 것을 듣고 조선군 3천 명과 평양성을 공격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그러나 이때 일본군은 성안에 웅거하여 군사를 잠복시키고 기다렸으며, 조승훈 등이 평양성 북쪽 문인 칠성문(七星門)으로 들어가자 일본군이 좌우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대었다. 이에 유격(遊擊)대조변(戴朝弁)·사유(史儒), 천총(千摠)마세륭(馬世隆)·장국충(張國忠) 등이 전사하고, 조승훈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되돌아갔다. 요동에 돌아가서는 ‘한창 전투할 때에 조선 군사 일진(一陣)이 적진에 투항하였다’고 거짓으로 고발하였다.

그 뒤 명나라가 이여송을 제독으로 하여 제2차 원병을 보낼 때, 조승훈도 다시 참전하였다. 명군은 1593년 1월 6일부터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선조실록』 26년 2월 10일), 조승훈은 유격낙상지(駱尙志)와 조선군의 병사 이일(李鎰),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께 남문인 함구문(含毬門)을 공격하였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평양성을 탈환한 뒤에는 사대수(査大受), 조선군 방어사고언백(高彦伯) 등과 영서역(迎曙驛)까지 일본군을 추격하여 일본군 600여 급을 베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6년 2월 5일).

조선에 계속 주둔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여러 차례 참여하였다. 이영(李寧)·갈봉하(葛逢夏)와 함께 거창에 주둔하였고(『선조수정실록』 26년 5월 1일), 해인사(海印寺) 등지에 머물러 방어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1년 5월 2일). 특히 1598년 울산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서생포 및 부산에서 구원하러 오는 일본군을 차단하였다(『선조실록』 31년 1월 1일)(『선조실록』 31년 1월 3일). 울산성 전투에서 타고 다니던 말이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죽어서 선조로부터 말을 받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1년 5월 2일). 조승훈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파병된 명군 장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종군하였다.

상훈 및 추모

아들 조대수로 인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좌도독(左都督) 소전(少傳)에 추증됨

참고문헌

  • 강응천 외,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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