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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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한국 정부의 보조를 받아 연안항로를 운항하던 부산기선주식회사, 목포항운회사, 요시다회조점 등 중소항운업자들이 1912년 3월에 합병하여 설립한 해운회사.

개설

러일전쟁 발발까지 주로 서양형 범선을 이용하고 있던 중소항운업자들이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얻은 일본우선 및 오사카상선[大阪商船]의 조일항로(朝日航路) 참입에 압박을 느끼고 한국의 연안항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본우선은 원양항로에 진출하며 조선항로를 축소했기 때문에 오사카상선이 최대 기선회사로 군림했다. 이에 경영 악화를 경험하며 위협을 느낀 기존의 부산기선주식회사(釜山汽船株式會社), 목포항운회사(木浦航運會社), 요시다회조점[吉田回漕店] 등 중소항운업자들이 부산기선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일대회사를 설립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도 치안 및 군사상 목적으로 조선우선 설립에 관여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1912년 3월 조선우선이 설립되었고, 동사는 총독부로부터 매년 30만 원의 보조를 받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우선주식회사가 설립된 것은 1912년 3월의 일로, 그 결과는 한국 해운업의 재편이었다. 한국 해운업의 재편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하나는 침체되고 있던 영업 성적을 향상시키고자 했던 재조일본인 해운업자의 경제적 동기였고, 또 하나는 한국 전역을 시야에 넣은 치안체제의 정비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군사적 동원체제의 확립이라는 일제의 정책적 동기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주로 서양형 범선을 이용하고 있던 중소항운업자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얻은 일본우선(日本郵船) 및 오사카상선의 조일항로(朝日航路) 침투에 압박을 느끼고 서서히 한국의 연안항로에 주목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전후 중소항운업자는, 당시 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 체결된 ‘연해급내하항행약정(沿海及內河航行約定)’하에 조직적으로 연안항로 진출을 꾀했고, 1911년 말까지 거대 기선회사와의 사이에 일정한 분업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사이 일본우선은 원양항로로의 진출이라는 자사의 사정 때문에 조선항로를 축소해간 반면, 오사카상선은 조일항로의 최대 기선회사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오사카상선에게 있어서 이 시기의 조선항로는 과잉선박의 배출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1910년부터는 조선총독부)의 보조를 얻어 연안항로 경영을 하고 있던 부산기선주식회사, 목포항운회사, 요시다회조점 등 중소항운업자의 영업성적은 경쟁 격화 등의 이유로 인해 좀처럼 향상되지 못했다. 그와는 달리 일제강점을 계기로 하여 개항장 간이나 일본과의 상업거래 필요성이 고양되고 있었다. 한국 정부의 보조금 급부 기한 또한 만기가 1911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하에 부산기선의 오이케 츄스케를 중심으로 기존 업자들을 통합하여 일대회사로 설립하려는 계획이 1910년경부터 추진되었다. 조선우선주식회사의 설립이 구체화된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부도 조선우선의 설립에 깊게 관여하였다. 그 주된 목적은 치안 및 군사에 있었다. 당시 통감부 탁지부 차관이었던 아라이 켄타로[荒井賢太郞]는, 상기 세 업자에게 명령항로 보조금을 교부할 때부터, 연안항로에 대해 “지금은 이미 세 항로가 성립되었지만 아직 유치한 수준으로 정부의 보조가 다하게 되면 과연 계속해서 잘 유지될 것인지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정부는 앞으로 항해업을 크게 장려하는 동시에 엄중한 감독을 해야 한다”고 말해, 일찍부터 조만간 재편, 장려 및 감독을 강제해갈 것이라는 뜻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역시 치안보지(治安保持)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출동체제의 구축이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우선 설립에 즈음하여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한국 연안항로를 통치상 소홀히 할 수 없고, 따라서 항해사업을 통일하여 일대회사를 조직함으로써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 내용과 맥락을 같이한다.

변천

1911년 7월 현재 재조일본인들로 이루어진 발기인회가 개최되었다. 진남포에서 나카무라 다츠고로[中村辰五郞]·나카무라 세시치로[中村精七郞]·아소 오토하[麻生音波], 부산에서 오이케 츄스케·오오이케 기사부로[大池喜三郞], 인천에서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원산에서 요시다 슈지로[吉田秀次郞]·이시가키 고지[石垣孝治]·가메야 아이스케[龜谷愛介]·나카무라 구니타로[中村國太郞]·니시지마 류조[西島留藏]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이 총 6만 주의 주식 중 3만 주를 인수하기로 했다. 1912년 1월 17일에는 조선총독부의 스즈키 아츠시[鈴木穆] 사세국장이 한국인 유력자로 조진태, 한상룡 두 사람을 불러 조선우선의 설립발기인을 의뢰했다. 최초 인수 예정 주수에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했지만 발기인을 중심으로 주식의 인수가 이루어지고 1월 19일에는 주식 모집이 완료되었다. 이왕직에서 5,000주를 인수하였고, 기타 한국인 주주로는 조진태와 한상룡이 500주를 인수하였다. 대부분 일본인 주주로 총 6만 주 중 54,000주를 재조일본인기업가가 46.3%, 도쿄 및 오사카 일본인 자본가들이 43.7%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왕직은 1913년 5월 5일 제1회 결산에서 소유주식 5,000주에 대한 배당금으로 1,875원을 수령하였다(『순종실록부록』 6년 5월 5일). 1914년 5월 1일에는 소유주식이 4,000주로 줄어 1,980원의 배당금을 수령하였고(『순종실록부록』 7년 5월 1일),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제3기 이익배당금으로 2,100원을 수령하였다(『순종실록부록』 7년 11월 2일).

1912년 3월 2일 발기인회에서는, 사장 하라다 긴노스케[原田金之祐], 전무 요시다 슈지로, 이사 호리 리키타로·오이케 츄스케·후가오 류타로[深尾隆太郞], 감사 아소 오토하·마츠자키 분로쿠[松崎文六], 상담역 곤도 렌페[近藤廉平]를 임원으로 선출했다. 선박은 부산기선회사로부터 11척, 요시다선박부[吉田船舶部] 및 요시다 슈지로로부터 4척, 목포해운회사로부터 1척, 오사카상선으로부터 1척, 기타 5명으로부터 5척, 총 22척을 구입했다. 또한 매년 6%의 배당이 보장될 수 있도록 총독부로부터 매년 30만 원의 보조를 받았다. 조선우선은 이렇게 자금·역원·선박 모든 측면에서 한국에 있던 중소자본, 거대기선회사, 총독부라는 3자의 합작이라는 성격을 갖고 성립했다.

참고문헌

  • 金明洙, 「近代日本の朝鮮支配と朝鮮人企業家・朝鮮財界─韓相龍の企業活動と朝鮮実業倶楽部を中心に─」, 慶應義塾大學大學院 經濟學硏究科 博士論文, 2010.
  • 木村健二, 『在朝日本人の社會史』, 未來社,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