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목상회사(朝鮮木商會社)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 정부로부터 압록강의 조선 측 유역과 울릉도의 나무 벌목 권한을 넘겨받아 관련 사업을 추진하던 러시아 회사.

개설

1896년(고종 33) 9월 9일 러시아 상인이자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업가였던 브리네르(J. I. Bryner)의 합성조선목상회사(合成朝鮮木商會社)에 압록강의 조선 측 유역과 울릉도의 벌목 및 양목(養木)의 권한을 넘겼다(『고종실록』 33년 9월 9일). 브리네르는 세금을 면제받는 대신 순이익의 1/4을 조선에 바치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브리네르는 먼저 압록강 유역 개발에 착수하였다. 압록강 유역은 주로 떡갈나무·느티나무·자작나무·물푸레나무 등이 많아 벌목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브리네르는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부영사 뽈리야노프스키를 통하여 삼림 벌채의 독점권을 확보하였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파천한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러시아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이권침탈을 본떠 압록강의 이권을 선점함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울릉도에 불법적으로 침입하여 벌목과 밀반출을 감행한 것은 러시아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일본 정부가 주도한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의 아관파천은 조선 내 친러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거처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에 광산과 삼림 이권을 헐값에 양도하였다. 고종은 1896년 9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및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을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상인 브리네르에게 허가하였다.

러시아는 1899년(광무 3) 8월에 도쿄 주재 공사를 통하여 울릉도 및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벌목 채벌권을 획득하였음을 밝히고 일본인의 벌목 금지를 요청하였다. 또한 러시아 군함도 1899년 말 울릉도에 잠시 정박하여 측량 및 일본인 동정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벌목 금지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울릉도의 일본인들을 11월 말까지 철수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목상회사의 설립은 브리네르라는 개인 사업가의 야망에서 출발하였지만 이후 브리네르가 확보한 이권은 러시아 정부의 조선 내 교두보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활용되었다.

그런데 브리네르의 벌목사업은 러시아 내 베조브라조프(A. M. Bezobrazov) 일파의 부상과 직결되어 있었다. 베조브라조프는 조선 내 이권의 정치·경제적 가치를 러시아 궁정과 정부에 주장하였다. 베조브라조프는 관영회사인 동아시아개발회사를 만들어 20,000명의 병력을 노동자와 회사원으로 위장시켜 배치함으로써 만주와 한반도 내 러시아 군사력의 선봉대로 세우려 하였다. 그 회사의 일원으로 브리네르의 조선목상회사를 포함시키려 하였다.

1898년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브리네르의 이권을 20,000루블에 매입하고자 하였다. 또한 광산 채굴권도 매입하려 하였다. 1899년 니콜라이 2세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던 베조브라조프는 브리네르가 지녔던 조선목상회사의 이권을 매입하였다. 베조브라조프는 1900년에도 압록강과 울릉도의 삼림 이권을 기반으로 동아시아개발회사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청국에서 의화단사건이 발생하여 만주 운영이 불투명해지고 일본의 울릉도 이권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자 브리네르가 차지하였던 이권은 경제적으로 가치가 추락하였다. 이에 따라 베조브라조프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반면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의 삼림 개발을 빌미로 하여 만주와 한반도 장악을 위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특히 의주 인근 용암포(龍巖浦)를 근거지로 벌목과 제재(製材)를 위한 회사를 운영하였다.

변천

1899년 여름 브리네르의 벌목권이 베조브라조프에게 넘어가고, 1901년에는 러시아의 요청으로 3년간 벌목 기한이 연장되었다. 1903년부터는 적극적인 벌목사업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용암포에 병참기지 구축을 위한 작업과 의주 인근의 토지 및 가옥의 매입도 추진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의 적극적인 한반도 개입에 불만을 가지고 영국 및 청국을 통한 외교적 압박과 대한제국 정부를 이용하여 러시아 세력의 견제를 추구하였다. 당시 독립협회를 비롯한 대한제국 내 민간단체들은 친러파의 득세와 국내 이권의 침탈을 막기 위하여 러시아의 용암포 철수를 촉구하였다. 1903년 7월에 러시아는 조선·중국·러시아가 접경한 오소리(烏蘇哩), 혼춘(琿春), 봉황성(鳳凰城), 안동현(安東縣) 등지에 수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켜 주변국을 자극하였다(『고종실록』 40년 7월 22일). 그러나 조선 정부는 1903년 7월 20일 러시아와 용암포지단조차협약(龍巖浦地段租借協約)을 체결하여 용암포의 조차를 용인하였다. 조차란 영토에 대하여 일정 기간의 임대 또는 점유를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용암포 점령을 강화하고 확장하려는 시도는 일본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더욱이 영국과 미국·청국이 모두 러시아에 외교 압력을 행사하자, 일본은 더욱더 대한제국 내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러일전쟁이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통감부일기(統監府日記)』
  • 『각사등록(各司謄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러시아대장성, 김병린 역,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 열강과의 조약』, 유풍, 1983.
  • A. 말로제모프, 석화정 역,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지식산업사, 2002.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송병기, 『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 역사공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