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산보(造山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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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경흥 관내의 조산에 설치한 구자보.

개설

조산보는 경흥(慶興)과 40여 리(약 16㎞) 떨어져 있는 관방이었다. 두만강 물가의 올적합(兀狄哈, [우디캐])과 가까워 방어상 요충지에 해당했다. 조산보에는 병선이 머물렀으며 수군만호가 거느리는 선군 90명이 방수했다. 봉화를 올리는 연대가 있었는데 세조대에 혁파했다. 조산보의 군민들은 봄에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鹿屯島)에 들어가서 농사짓다가 수확하고 나면 다시 조산보로 돌아와 방수했다.

위치 및 용도

조산보는 영북(寧北)의 동쪽에 있으며 경흥과 40여 리 떨어져 있다. 1435년(세종 17)에 영북에 종성군(鍾城郡)을 설치할 때 조산 등지의 거주민들을 이에 붙였다. 무이(撫夷)로부터 경흥을 지나 조산보에 이르기까지 90여 리(약 35㎞)가 된다. 경흥은 강가의 요새에 웅거하고 있어 무이보(撫夷堡)와 조산보가 상하에서 마주 보여 적의 움직임이 한눈에 다 보였다. 때문에 방어하기 좋은 형세였다.

조산보는 무이보와 더불어 경흥에 있는 관방(關防) 두 곳 중의 하나로 병선이 머무르며, 만호가 거느리는 선군(船軍) 90명이 지켰다. 조산은 야인들이 쉽게 들어와 노략질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경원진(慶源鎭)에서부터 조산보에 이르기까지 장성(長城)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두만강 물가의 올적합이 바닷가를 따라 경유하는 길이기도 하면서 큰 규모의 사변이 있으면 모두 여기서부터 침입하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조산보는 방어상 긴요한 땅이었다. 이에 1493년(성종 24) 4월에 장성을 쌓아서 조산보를 동쪽 머리에 옮기고, 경흥을 중앙에 옮겨 무이와 잇달아 배치함으로써 10리(약 4㎞) 사이에 군영과 진이 죽 늘어서 있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조산보에는 연대(煙臺)가 있었는데, 1457년(세조 3) 혁파했다(『세조실록』 3년 8월 8일). 1492년 조산의 만호는 의흥위(義興衛)·용양위(龍驤衛)·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 등의 부사용(副司勇)에서 임명하도록 했다.

변천 및 현황

성종대 후반 조산 등지는 땅이 추워 고통스러운데도 목화가 생산되지 않아 백성이 겨울과 여름에 모두 베옷을 입고 있고, 아이들은 옷이 없어서 항상 움막에 있으며, 연대의 군사가 동상을 참고 밤을 지켰다. 1509년(중종 4) 당시 조산보의 수자리 사는 군졸은 모두 수군으로 거의 수준이 별 볼 일 없었으며, 적을 대비할 기구도 허술했다. 조산보만호 군관은 군자미로 공궤하지 않고, 바다에서 소금을 구워 무역하여 썼다. 조산보의 방수가 다른 진보에 비하여 헐하고, 토질이 기름지고, 비워둔 곳이 많아 방수하는 여가에 둔전(屯田)을 개간해도 양곡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510년 3월 녹둔도는 야인 쪽과는 물이 깊어 왕래하기 어렵고, 조선 쪽 경작하는 길은 물이 얕아 다니기가 쉬우니 조산보만호로 하여금 그곳으로 보를 옮겨 설치하게 하여, 경작하거나 수확할 때에 수호하도록 했다. 1542년(중종 37) 당시 앞서 경흥 본진(本鎭)에서 강제로 조산보에 이주되었던 사람들이 죄다 흩어져버려 겨우 열 가구가 있는데도 녹둔도에 가서 경작했다. 때문에 만호는 봄에 농사지을 때가 되면 경흥을 비우고 군민을 거느리고 녹둔도에 가서 성으로 삼고 무기를 옮겨 놓았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왕래할 때 모두 가산(家産)을 옮겨야 했으므로, 이곳 백성들은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거의 다 도망하여 떠나간 것이다. 게다가 명종 2년(1547) 8월 당시 경흥부 조산보가 심하게 쇠잔한데도 다시마 등의 물품을 한 달 안에 세 차례 올려야 했으므로, 그 피폐함이 극심했다. 1776년(정조 즉위) 4월 삼삼파(森森坡)·황척파(黃拓坡) 등과 더불어 조산보 등 3진의 토졸(土卒)을 그 부근의 사찰 노비 중의 일부를 더 배정해 주도록 했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9일).

형태

1488년(성종 19) 3월에 쌓은 조산보는 성의 높이가 10척(약 3m), 둘레가 3,522척(약 1㎞)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89년 1월 조산의 만호양취(梁鷲) 등이 노공필 등의 재상과 더불어 역모를 공모했다 하여 잡아와 그에 관해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성종실록』 20년 1월 2일).

1491년 1월 12일에 올적합 1천여 명이 조산보를 에워싼 뒤 군사 3인을 사살하고 26인을 다치게 하였으므로, 경원부사(慶源府使)나사종(羅嗣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두만강을 건너가 싸웠으나 나사종은 전사하고 많은 군사들이 사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성종실록』 22년 1월 19일). 그것을 계기로 북방지역 정벌에 대한 논의가 일어, 함경도관찰사허종(許琮)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10월에 정벌하기로 정하고 각 도의 군사 2만을 징발하여 10월 15일에 5천의 정병(精兵)이 강을 건너 올적합의 소굴을 분탕하고 11월 2일 강을 건너 돌아왔다. 이를 신해북정(辛亥北征)이라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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