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친왕(鄭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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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누르하치의 동모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슈르가치[aisin gioro šurgaci, 愛新覺羅 舒爾哈齊]의 6번째 아들 지르갈랑[jirgalang, 濟爾哈朗]의 봉작호.

개설

지르갈랑([濟爾哈朗], jirgalang)은 어려서부터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가 직접 길렀으므로 관계가 매우 돈독하였다고 한다. 청년기에는 누르하치를 따라 종군하여 세운 전공을 바탕으로 호쇼이 버일러([和碩貝勒], hošoi beile)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슈르가치와 형 아민(阿敏, amin)이 모두 역률로 처단된 이후에도 지르갈랑은 예전과 같이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다.

1627년에 그의 둘째 형인 아민을 따라 조선 정벌에 참여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참가하지 않고 성경(盛京)에 남아서 지켰다. 1636년 4월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가 황제에 등극하면서 호쇼이 우전[和碩鄭] 친왕(親王, [hošoi ujen cin wang])이 되었다. 순치제가 즉위하자 도르곤([多爾袞], dorgon)과 함께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었으나 곧 권력을 섭정왕(攝政王) 도르곤에게 이양하였다. 순치제(順治帝)의 친정(親政) 이후에는 권력을 쥐고 배후에서 오랜 세월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도르곤을 제외하면 청나라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숙왕(叔王)의 호칭을 받았던 인물이다. 조선에서는 지르갈랑을 질가(質可) 혹은 질가왕(質可王)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우진왕(右眞王)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의 봉작인 우전 친왕([鄭親王], ujen cin wang)을 발음대로 옮겨 적은 결과이다.

가계

지르갈랑은 슈르가치의 6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울라([烏拉], ula) 부간([布干], bugan) 버일러의 딸이자, 누르하치의 조카인 울라나라([烏喇納喇], ulanara)씨이다. 적비인 원비(元妃) 뉴호록씨(鈕祜祿氏) 외에 17명의 적실·측실·첩을 두었는데 이들로부터 10명의 아들과 14명의 딸을 낳았다. 지르갈랑의 사후에 부인 중 5명이 순장되었다.

활동 사항

지르갈랑은 혁혁한 전공을 세워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으로 일컬어진다. 청소년 시기부터 누르하치를 쫓아 많은 전공을 세웠고 이를 바탕으로 호쇼이 버일러의 지위를 거머쥐었다. 1624년 11월 지르갈랑은 타이지 아바타이([阿巴泰], abatai) 등과 함께 출병하여 몽골 차하르([察哈爾], cahar) 부의 칸 릭단([林丹], lindan)의 포위공격으로부터 코르친([科爾沁], korcin) 부를 도왔다. 1625년에는 칼카([喀爾喀], kalka) 몽골의 바린([巴林], barin) 부를 공격하였고, 같은 해 재차 자루트([扎魯特], jarut) 부를 공격하여 모두 현저한 공로를 세웠다.

1627년 1월, 지르갈랑은 형인 아민, 요토([岳托], yoto)를 따라 조선으로 출정하였다. 아민이 조선 왕의 강화 요청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요토 등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1627년 3월에는 홍타이지를 쫓아 명의 금주(錦州)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탑산(塔山)의 명군이 지원하러 진군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그 뒤 영원(寧遠)을 공격할 때 명의 총병만계(滿桂)의 군사와 조우하여 맹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지르갈랑은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맹렬하게 싸워 끝내 만계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1628년 5월, 지르갈랑은 호오거([豪格], hooge)와 함께 몽골의 추장 구터이 타부낭([固特塔布囊], gutei tabunang)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를 죽였으며 그의 부락을 복속시켰다. 1629년 8월에는 버일러 더걸러이([德格類], degelei), 요토, 아지거([阿濟格], ajige)와 함께 명의 금주와 영원을 다시 공격하였으며 10월에는 대안구(大安口)를 공격한 뒤, 12월에 통주(通州)의 명군 선박을 불사르고 장가만(張家灣)을 점령하였다.

그는 1630년에 명의 영평성(永平城)을 포위하여 공격한 끝에 점령하고 이 지역을 지키다가 홍타이지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는데, 도중에 진자진(榛子鎭)을 항복시키기도 하였다. 1631년 8월 지르갈랑은 홍타이지와 함께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을 포위하고 자신의 양람기(鑲藍旗) 군사들을 이끌고 서남쪽을 공격하였고 인근의 작성 보들을 점령하였다. 또 지르갈랑은 11월 후금이 대릉하성을 함락시키고 돌아갈 때까지 탑산의 동쪽 해안을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632년 5월 지르갈랑은 차하르몽고(몽골) 정벌에 종군하여 요토와 함께 우익군(右翼軍)을 통솔하여 귀화성(歸化城)으로 진공하여 차하르 부의 사람 1,000여 명을 거두는 전공을 세웠다. 1633년 3월에는 수암성(岫岩城)의 수축을 지시받고 이를 감독하는 중에 등주에서 바다 건너 내항(來降)하는 명의 장수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을 맞이하였다. 이때 명의 총병황룡(黃龍)이 거느린 수군을 격파하고 공유덕 등을 요격하려는 조선군을 저지하였다. 그해 6월, 지르갈랑은 홍타이지가 여러 버일러들을 거느리고 조선·명·차하르 중 어느 곳을 먼저 공략할 것인지 하문하자 신중론을 펼치고 명을 압박하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홍타이지는 그의 신중함을 높이 평가하여 친정할 경우 성경에 남아 유수(留守)하게 하였다. 이로써 1634년 차하르 정벌과 1636년 병자호란 때 지르갈랑은 성경에 주둔하면서 수비하였다.

1638년 5월 지르갈랑은 영원성 공격에 참가하였고, 1639년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금주와 송산(松山) 일대를 공격하여 명군과 9차례 싸워 모두 이기고 명군 3,000여 명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 1640년 3월에는 의주성(義州城)을 수축하고 둔전을 일구면서, 금주성에 대한 재차 공격을 준비하였다. 9월에는 금주성을 공격하였으며 명군이 출격할 때마다 맞받아쳐서 격퇴하였다. 당시 지르갈랑은 도르곤과 함께 심양에 머물던 소현세자 일행의 관리에도 간여하여 친분을 쌓았고, 1640년 소현세자 등이 잠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집에 불러 송별연을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8년 2월 18일).

1641년 지르갈랑은 금주성을 공격할 때 명군의 지원군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 조선의 포수들을 활용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9년 7월 12일). 그해 8월 홍승주(洪承疇)가 13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왔을 때 홍타이지가 친정을 떠나자 다시 성경에 남아 지켰다. 9월에 홍타이지가 돌아오자 금주로 다시 나아갔고, 12월에는 홍승주의 야습을 맞받아쳐서 격파하였다. 1642년 호오거가 송산을 격파하여 홍승주를 사로잡게 되자, 지르갈랑은 재차 금주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조대수(祖大壽)의 항복을 받았다.

1643년 8월 9일 홍타이지가 성경의 청녕궁(淸寧宮)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위 계승의 문제로 인해 내분이 발생하였다. 홍타이지의 맏아들인 호오거와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은 제위를 두고 경쟁하였는데, 두 황기(兩黃旗)와 두 백기(兩白旗)가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지르갈랑은 신중하게 처신하여 한쪽에 부합하지는 않았다. 결국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호오거의 동생인 푸린([福臨], fulin)을 등극시키기로 결정되자, 지르갈랑은 도르곤과 함께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어 정무 일체를 관장하였다(『인조실록』 22년 1월 20일).

지르갈랑은 산해관의 입관 후에 보정숙왕(輔政叔王)이 되었으나 사실상 권력에서 배제되었고, 도르곤은 동복형인 아지거, 동복동생인 도도 등의 지지를 받아 두 황기를 모두 차지한 뒤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647년 2월 지르갈랑은 보정의 직무에서 파면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호오거와 관련한 계승 문제로 인한 옥사가 벌어져 훈신(勳臣)들의 자손들이 대거 연루되고 호오거가 유폐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 지르갈랑은 도로이 군왕([多羅郡王], doroi giyun wang)으로 강등되었다가 곧 친왕으로 복작되었다.

1650년 도르곤이 사망하자, 지르갈랑은 앞장서서 그의 죄상을 물었다. 도르곤의 봉작과 시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그의 세력이 처단되었다(『효종실록』 2년 3월 17일). 지르갈랑은 도르곤의 실각 후 권력을 잡게 되었고 1652년 숙부 호쇼이 우전 친왕(叔和碩鄭親王)으로 봉해졌다. 지르갈랑은 권력의 핵심에 선 뒤 1655년에 병이 깊어져 사망하였다.

묘소

지르갈랑의 병이 깊어지자 순치제는 크게 울면서 오랫동안 그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르갈랑이 죽자 북경의 서쪽 백석교(白石橋)에 그를 장사 지냈다. 순치제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7일 동안 정사를 파하게 하였고, 은 10,000냥으로 장사 지내게 하였다. 또 10호를 그의 무덤에 두어 지키게 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상훈 및 추모

1671년 6월, 강희제(康熙帝)는 그에게 ‘헌(獻)’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1754년 건륭제(乾隆帝)는 성경의 현왕사(賢王祠)에 그를 입사하였다. 또 1778년에는 태묘(太廟)에 배향하고 사왕(嗣王)의 봉호를 ‘정(鄭)’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任金玲, 「多爾衮與濟爾哈朗輔政問題探究」, 『金田』, 2014年 5期.
  • 趙丰年, 「濟爾哈朗與多爾衮比較硏究」, 『黑龍江史志』, 2015年 7期.
  • 陳作榮, 「論多爾衮在建立淸政勸過程中政策的兩重性」, 『東北師大學報』, 1983年 2期.